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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유진오 초안엔 내각제… 국회 상정 전날 대통령제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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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1948년 대한민국 출범] [5] 제헌헌법을 제정하다

대통령 독재에 대한 우려컸지만 "건국초 정권안정 우선"에 물러서

조선일보

서희경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


1948년 7월 12일 제헌국회 본회의에서 헌법안 제3독회가 끝났다. 이어 기립표결로 제헌의원 전원이 찬성해 헌법이 최종 통과됐다. 그리고 닷새 뒤인 7월 17일 마침내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됐다. 국망(國亡) 38년, 해방 3년 만이다. 이승만 국회의장은 "지금부터는 우리 전 민족이 고대 전제나 압제 정체를 다 타파하고 평등 자유의 공화적 복리를 누릴 것을 이 헌법이 담보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헌법 제정과 정부 수립을 임무로 하는 제헌국회 첫 회의는 1948년 5월 31일 열렸다. 헌법 제정은 크게 3단계를 밟았다. 1단계는 전형위원 선출이었다. 2단계에서는 전형위원이 헌법기초위원을 선출하고, 그 기초위원이 헌법초안을 작성했다. 3단계는 국회에서의 헌법 독회 및 심의였다.

헌법기초위원회는 유진오 전문위원의 헌법안을 원안으로 16차 회의 끝에 초안을 작성했다. 최대 쟁점은 대통령제와 내각제 문제였다. 한민당은 내각책임제를 지지했다. "책임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지론 때문이다. 이승만에게 필적할 대중적 정치가가 없다는 현실적 이유도 있었다. 반면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를 강력히 원했다. "대통령 임기 동안은 정부가 안정된 상태에 있어야 하고, 국회가 이를 변경할 권한을 가져선 안 된다"는 명분이었다.

유진오가 기초한 원안은 내각제였다. 그런데 국회 본회의 상정 하루 전인 6월 22일 갑자기 대통령제로 변경됐다. 전날인 21일, 이승만은 "내각제하에서는 어떠한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고 민간에 남아서 국민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김구가 참여하지 않는 가운데 이승만마저 빠지면 정부 수립은 불가능했다. 그날 밤 서상일 헌법기초위원장 등 한민당 중진들이 모였다. 한민당 당수 김성수는 "건국 초에 정권 교체가 잦으면 정치적 혼란을 막기 어렵고, 새 나라의 초석을 놓는 데도 비능률적이므로 이 박사의 의사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무마했다. 4·3 사건 등 좌우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이승만 박사에게 강력한 통치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도 무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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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7월 12일 제헌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최종 확정된 제헌헌법에 서명하는 이승만 국회의장.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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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 헌법초안 독회 과정에서도 논쟁이 치열했다. 주요 쟁점은 임시정부의 계승 여부, 정부 형태, 농지개혁, 반민족행위자 처벌 등이었다. 임정 계승 여부는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체성에 관한 문제였다. 헌법 전문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임정의 법통이 아닌 정신을 계승한다고 해석했다. 법통은 1987년 헌법에 이르러 명시됐다. 지금의 건국 기점 논쟁도 이와 관련 있다.

대통령 독재에 대한 우려도 컸다. 조봉암 의원은 "행정부 독재를 방지하려면 국회의 우위적 권한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대통령 권한을 강력히 통제하는 안이 채택됐다.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고, 국무원은 합의체 의결기관으로 규정됐으며, 대통령의 국정행위는 국무위원의 부서를 받도록 했다. 하지만 그 제한들은 이후 하나씩 무력화됐다. 대통령의 권력 문제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최대 난제였다.

제헌헌법은 경제에 관한 장을 별도로 두었다. 그중 농지개혁이 최대 쟁점이었다. 농지는 농민이 자작(自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시대 인식이었다. 당시 농지의 65%가 소작지였다. 헌법초안 제85조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함을 원칙으로 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고 했다. '원칙으로 한다'는 모호한 표현이 문제였다. 유진오 전문위원은 "농지를 농민에게 분배한다. 그렇지만 예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확정적 수정안이 가(可) 94, 부(否) 65로 최종 통과됐다. 이는 1949년 농지개혁법의 헌법적 근거가 됐다.

반민족행위 처벌 문제도 뜨거운 쟁점이었다. 헌법초안 제100조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1945년 이후의 '악질적 반민족 행위' '반역 행동이라든지 간상배(奸商輩)의 행위'도 처벌하자는 의견이 강력히 제기됐다. 대상은 미군정하의 정상배나 친일 경찰이었다. 그러나 근소한 차이로 원안이 가결됐다.

가장 논란이 많고 시간이 소요된 쟁점은 의사진행 절차였다. 민주적 절차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규칙과 관행이 없었기 때문이다. 의원들은 더 많이, 더 길게 발언하려고 경쟁했다. 제헌국회는 시간적 압박 속에 있었다. 그럼에도 제헌국회의 심의와 토론, 타협 과정은 한국 헌정사에 모범이 됐다. 북한의 헌법 제정 과정을 보면 절차는 껍데기뿐이었다. 남북한 정치체제의 결정적 차이 중 하나다. 민주주의는 내용만큼 절차에 존재한다는 것이 제헌헌법 제정 과정이 남긴 교훈이었다. 다만 시민사회의 공론장에서 폭넓은 논의가 이뤄지지 못한 점은 아쉽다.


공동기획: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서희경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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