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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시선]“우리 민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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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오늘 낮에는 꽤 더워서 등이며 이마에 땀이 났는데 그래도 왠지 아버님이 계신 곳은 춥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산 밑이라 추우면 어떻게 하나 너무 깊은 곳이라 볕의 온기가 충분치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괜스레 들었습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것도 같고 벌써 꽤 오래전에 벌어진 일 같기도 하고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어 날짜를 자꾸 확인하고 세어보게 됩니다.

정말 혼이 나갔다라는 말이 이런 때 쓰는 말일까요. 아버님을 보내드리는 일이 이렇게 힘든 것을 보니 제가 아버님을 정말 많이 좋아했나 봅니다. 이런 저런 기억을 떠올릴수록 새록새록 감사한 마음이 앞서고 결국 마음이 울컥해 또 눈물이 나네요.

아버님께서 우리 민지라고 저를 부르시던 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감사하게도 아버님께선 한 번도 두 며느리를 누구의 처, 누구의 엄마라고 부르신 적이 없습니다.

경향신문

어릴 때 듣고 자란 ‘예솔아, 아버지께서 부르셔. 예, 하고 달려가면 너 아니구 네 엄마’라는 노랫말처럼 아이를 기르는 여자에게 사회는 너무 쉽게 ○○엄마라는 세상에서 제일 강력한 이름표를 붙이곤 합니다. 누군가의 엄마로 산다는 것은 특별하고 행복한 정체성이지만 한편 많은 여성들이 그 전까지 온전히 갖고 있던 제 이름을 잃어버리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요.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엄마가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다른 사람에게 본인의 원래 이름을 밝히는 것조차 어색해하는 여성분을 만난 적도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어떤 큰 뜻으로 제 이름을 꼬박꼬박 챙겨 불러주셨는지 알 길은 없지만 엄마가 된 이후에도 제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손주의 엄마가 아니라 아들의 아내가 아니라 온전한 제 자신으로 아버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님과 저 사이에 존재하는 40년 가까운 시간의 차이는 정말 넓고도 깊었을 것입니다. 생각이나 행동,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나 바람들이 많이 다를 수밖에 없었을 텐데 어떻게 아버님은 한결같이 제게 응원을 보낼 수 있으셨나요. 찾아 뵙고 돌아서는 길에 혹은 안부전화를 끊을 무렵이면 늘 네가 수고한다고, 고생이 많다고, 열심히 살아주어 고맙다고 말씀해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사실 가끔은 내가 진짜 고생하며 살고 있나 고개를 갸웃하며 민망해한 적도 있습니다. 아버님이 생각하시는 열심히 사는 삶은 지금의 나보다는 더 치열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알뜰살뜰 부지런히 살기보다 재밌고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아버님이 아직도 날 오해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하는 괜한 걱정도 해보곤 했습니다. 생면부지의 관계에서도 몇 줄 안되는 댓글로 서로를 평가해버리고 그저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최대의 목표이자 성과로 인정받는 요즘 그런 맹목적인 지지는 흔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10여년 동안 한결같은 말씀을 듣다보니 어느덧 그 인사들이 제가 가진 든든한 뒷배경처럼 느껴져서 어깨에 힘이 실리곤 했습니다. 네가 무엇을 이루어서, 네가 무엇을 해주어서 고맙다가 아니라 그저 열심히 살아서 예쁘다, 고맙다라는 말을 건네는 어른을 가까이서 만났다는 것은 제게 정말 큰 행운이고 복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법, 누군가를 온전하게 바라보고 지지하는 법을 많이 배웠습니다. 아버님께 배운 것처럼 살 수 있도록, 특히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묵직한 응원을 보낼 수 있는 든든한 어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님. 이제 편히 쉬세요.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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