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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책과 삶]삶의 진실 감내하는 ‘사소한 히어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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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의 영원한 밤

김인숙 지음 | 문학동네 | 284쪽 | 1만3000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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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작가(55)가 오랜만에 내놓은 소설집 <단 하루의 영원한 밤>의 맨 앞에 실린 소설 ‘델마와 루이스’란 제목을 보고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연출한 미국 영화 <델마와 루이스>(1991)를 떠올리는 이들이 꽤 있을 법하다. 가부장제의 구속을 벗어나 질주하는 델마와 루이스, 두 여성을 따라가는 로드 무비다. 소설은 이 영화를 패러디한 듯하다. 다만 영화 주인공들이 젊고 친구 관계인 것과 달리 소설 속 델마는 87세, 루이스는 89세인 생김새가 꼭 닮은 자매로 등장한다. 아흔을 앞둔 두 할머니는 어느 날 가출을 감행한다. 그들을 보살핀 자식들 보기에 그것은 “해서는 결코 안되는 거”였는데, 그들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을까.

미국에 살던 루이스는 한국의 매생이국밥이 그리워 동생 델마를 찾아왔다. 직접적인 ‘가출 동기’는 작품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둘은 택시를 잡아타고 바다로 향한다. 가는 도중에 유원지 근처의 모텔에서 하룻밤 묵기도 하고, 지갑을 도둑맞아 식당에서 밥값을 치르지 않고 줄행랑을 치기도 한다. ‘마냥 무기력하기만 할 것’이라는 노인들에 대한 편견을 깨뜨린 소설은 택시기사, 모텔 카운터의 청년, 식당 주인 등 여러 남성들의 시선으로 두 할머니를 따라간다. 이들에겐 델마와 루이스가 죽은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떠올리게 하는 ‘이상한 할머니들’일 뿐이었는데, 한 식당에서 만난 모녀는 달랐다. 사냥꾼 남편의 가학적인 행동을 견뎌온 식당 여자와 그의 딸은 델마와 루이스의 여행을 따라나선다.

극중 실명으로 나오는 남성들과 달리 ‘여자’와 ‘여자아이’로 지칭됐던 모녀는 바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최영자’와 ‘부영희’라는 제 이름을 각각 불러낸다. 최영자와 델마는 서로의 손을 마주 잡는다. “남자 여자 같이 간 여행이면 벌써 싸우고 패고 난리가 났을 텐데, 여편네들끼리는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겠니.” 루이스의 말처럼, 여성들은 묵묵히 서로를 지지한다.

델마는 오롯이 바다만 생각하다가 자신이 60여년 만에 처음으로 자식들 생각을 잊었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을 지탱해왔던 마지막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그것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충만되는 것이었다”. 델마와 루이스는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나 돌아간 자리가 삶인지, 죽음인지 경계는 모호했다. 다만 영화 속 명대사처럼 ‘렛츠 킵 고잉’(Let’s keep going·계속 가봅시다) 하는 수밖에.

경향신문

<단 하루의 영원한 밤>에는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양경언 문학평론가는 수록작들의 인물들을 두고 “‘오직 자신에게만 특별한’ 자리에서 계속 사는 편을 날마다 택한 이들”이라고 했다. 표제작인 ‘단 하루의 영원한 밤’은 30년 전 어느 하루의 일탈로 제자에게 사생아를 낳게 한 뒤, 평생 모욕과 싸워온 노교수와 그를 ‘선생’이라 부르는 ‘그’가 등장한다. 선생은 스스로에게 부끄러웠으나 세상의 비난은 제자가 감당했다. 제자의 딸 M과 연인이었던 ‘그’는 어느 순간 선생과 자신의 삶이 겹쳐지는 경험을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여러 실수들에 대한 창피함을 인식하면서다. 누군가의 삶은 영원히, 그러니까 날마다 부끄러움을 갱신하는 삶이다.

작가는 성폭행 생존자이지만 기억의 오차 때문에 가해자를 잘못 지목하는 바람에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며 자신도 가해자가 돼버린 여성(‘넝쿨’)의 이야기로 극단적인 삶의 풍경을 제시한다. 그런가 하면 예순일곱의 나이로 영어학원에 다니면서 자신의 삶이 ‘깨진 질그릇’ 같다고 느끼지만, 다시 짜맞춰진 박물관의 토기처럼 삶의 디테일을 채워나가려 애쓰는 여성(‘토기박물관’)의 삶도 그린다. 그리고 원룸 이삿짐을 옮기며 평범하게 살아서 ‘비밀 하나 없을 것 같다’는 이유로 아내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되는, 하지만 실은 빈집 하나에 자신만의 세계를 꾸린 남성(‘빈집’)의 이야기도 썼다. 수록작들을 읽다보면 삶의 진실은 자신만이 아는 비밀 같은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1983년 등단해 데뷔 35년을 맞은 작가는 이번 소설집을 펴내며 “히어로가 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아주 사소한 히어로”라고 ‘작가의 말’에 썼다. 그리고 작가는 여러 주인공들을 일일이 열거하며 ‘히어로’라 했다. “세상을 구원할 필요도 없고 아무것도 구원할 필요가 없는” ‘아주 사소한 히어로’ 말이다. 그들은 다시 말하자면 ‘계속 가보자’고 말하는 “징그러운 삶의 진실을 감내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양경언 평론가)이다.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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