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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월)

운명도 외모도 긍정했던 팜므파탈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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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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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혼수래 혼수거

14. 황진이(조선 중종시대·1520~60년으로 추정)

일찌감치 가왕 조용필도 노래했다. “내가 부르면 내가 부르면 잔 잡아 권하실 님. 청초에 백골만 남을 님. 그대는 황진이 내 사랑 황진이”. 가왕뿐이랴 조선 시대 기생 황진이의 이야기는 드라마, 영화, 소설 등으로 만들어져 그가 살았던 시대에서 50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유난히 예술가와 대중들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인물이다. 하지원, 송혜교, 이미숙, 장미희 등 최고의 배우들이 그를 연기했을 뿐 아니라 작가 최인호, 전경린, 김탁환, 북한의 홍석중까지 그의 일대기를 소설로 써냈다.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특별한 매력이 있길래.

일단 연애박사였다. 양반의 서녀(첩이 낳은 딸)로 태어난 그는 16세기 조선의 규범대로라면 양반의 첩이 될 운명이었지만 ‘서출’이라는 신분을 걷어차고 스스로 기생의 삶을 선택해 당대 남성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황진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성옹지소록>에서 허균은 “진랑(황진이)은 성품이 얽매이지 않아서 남자 같았다. 거문고를 잘 탔고 노래를 잘했다”고 적고 있다. 이외에도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덕형의 <송도기이>, 김택영의 <송도인물지> 등이 황진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여기서 거론되는 연인들의 이름만 대충 꼽아도 7~8명에 달한다.

“중국인들도 금강산을 한번 보길 원한다던데 선산을 지척에 두고 진면목을 보지 못한대서야 되겠는가”라며 재상의 아들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하고 거지꼴로 돌아오거나, 한양 제일 소리꾼 이사종에 반해 6년간의 ‘계약 동거’를 제안한 일, 유명한 도학자 화담 서경덕(1489~1546)을 목표로 유혹했으나 그의 지성과 품성에 반해 평생 연모하며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는 이야기는 그가 타고난 ‘사랑꾼’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물론 잘 알려진 것처럼, 10년 면벽 수행 중이던 지족 선사를 파계로 이끌었다거나, ‘청산리 벽계수야 쉬이 감을 자랑 마라’라는 시로 세종대왕의 증손자 벽계수(이종숙)를 유혹하고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는 그의 팜므파탈적인 면모도 빼놓으면 섭섭하다.

조선 최고라고 할 만한 연애시들을 남겼다. 다른 예술가들처럼 황진이도 자신의 삶과 사랑을 시로 남겼는데, 현재까지도 애송되는 시 ‘동짓날 기나긴 밤’은 이사종과의 열정적인 사랑을 읊은 것이다. “황진이와 단 30일만 동거하고, 더 머물면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던 소세양도 마지막날 그녀가 읊은 시 ‘달빛 아래 뜰에는 오동잎 모두 지고’를 듣고 마음을 바꿔 그의 곁에 더 머물렀다고 한다. 이렇듯 시적 재능으로 남자를 쥐락펴락한 그이지만 안타깝게도 전해 내려오는 작품은 고작 한시 4~5수, 시조 6수뿐이다.

아름답고 요염한 외모로 많이 회자되는 황진이지만, 여러 기록에서 그가 외모를 꾸미는 데에 크게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진랑이 비록 창류(娼流)이긴 했지만, 관부의 주석에 나갈때 다만 빗질과 세수만 하고 나갈 뿐 옷도 바꾸어 입지 않았다”거나 “진랑은 해진 옷에다 때묻은 얼굴과 발로 그 좌석에 끼어 앉아 태연스레 이를 잡으며 노래하고 거문고를 타되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서경덕, 박연폭포,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일컬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을 정도로 그는 자신의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를 긍정하는 페미니스트였던 것 같다. 16세기에 이미 ‘걸스 캔 두 애니씽’(Girls can do anything)을 실천한 여인, 그가 지금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아마 ‘아이돌’이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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