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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8 (월)

[friday] 누구와도 결혼할 마음 없는데 맞선이 잘될 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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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달달술집으로]

조선일보

이주윤


"얘, 바쁘니? 안 바쁘면 내 말 좀 들어봐."

나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말투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긴히 의논할 거리가 있다는 듯 속삭이는 목소리와 마른침을 삼키느라 생기는 잠시간의 정적, 긴장을 늦추기 위해 연신 내뿜는 콧바람이 한데 어우러져 불길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았을 때 이건 맞선 보라는 얘기를 꺼내기 직전의 분위기가 아니란 말인가!

나는 엄마의 이야기를 가로채며 쌀쌀맞게 말했다. "선보라는 소리 할 거면 됐으니까 끊어." 엄마는 선은 무슨 선이냐며 괜히 이런저런 말들을 에둘러 늘어놓다가 끝내는 이실직고했다. 아빠 친구 아들 중에 대기업 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진짜 아까운 남자니까 일단 한번 만나나 보라고 말이다. 그럼 그렇지. 척하면 삼천리야.

아빠와 엄마는 환상의 복식조다. 아빠가 갖은 인맥을 동원해 선 자리를 마련해 오면 엄마는 설득, 회유, 협박 등의 기술을 총동원하여 어떻게든 나를 그곳에 내보내고야 만다. 싫다고, 안 나간다고, 그냥 이렇게 살다가 노처녀로 늙어 죽을 거라고 악다구니를 써보기도 했다. 그러나 핏덩어리에 불과한 내가 연륜으로 똘똘 뭉친 그들의 합동 공작을 빠져나가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20대 내내 얼마나 많은 남자와의 불편한 만남을 가졌는지 모른다. PD, 회계사, 은행원, 변호사, 자영업자, 의사, 건축가, 사회복지사, 특별히 하는 일은 없지만 부모님께 물려받을 재산은 좀 있는 팔자 늘어진 백수 나부랭이까지. 열 손가락을 몇 번이고 접었다 폈다 해야 그 수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다.

엄마가 정말 괜찮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남자들이 내 눈에는 하나도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체격이 좋다는 사람은 뚱뚱했고 믿음직스럽게 생겼다는 사람은 머슴 판박이였으며 패션에 관심이 많아 멋쟁이라는 사람은 각설이 뺨치는 요란스러운 옷차림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속았다는 생각에 열이 받을 대로 받은 나는 상대방에게 땍땍거리며 화를 풀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 격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들에게 무척이나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들 역시 자기 부모에게 속아 나를 참한 색싯감인 줄로만 알고 선을 보러 나왔을 텐데 웬 쌈닭 같은 것이 시비를 걸고 자빠졌으니 얼마나 곤혹스러웠을꼬. 혹시나 이 글을 보고 있다면 그때는 내가 철이 없어도 너무 없어 그랬노라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지나간 일이야 어쩔 수 없지만 같은 과오를 또다시 범하지는 않으련다. 이제 더는 맞선 따위 보지 않겠다. 그리하여 나도 상대편도 기분 상하는 일 애초에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엄마에게 대꾸했다. "대기업이고 자시고 만나봤자 잘될 일 절대 없으니까 그만 얘기하셔." 엄마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듯 그 어느 때보다도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만나보지도 않고 잘될지 안 될지 그걸 어떻게 알아? 네가 점쟁이야 뭐야? 너 진짜 이렇게 나올 거야? 엄마 피 말라 죽는 꼴 보고 싶어? 어!"

예전 같으면 이쯤에서 오금이 저려 깨갱 했겠지만 엄마, 이제 나도 어린애가 아니라오. 잘될지 안 될지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아직은 내가 누구와도 결혼할 마음이 없으니까 잘될 일 없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이주윤·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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