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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8 (월)

[friday] '불쇼'없는 칵테일바 요리가 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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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식탁] [정동현의 음식이 있는 풍경] 서울 서교동 '디스틸'

조선일보

디스틸 내부 풍경. 원목으로 짠 가구와 바 카운터는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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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텐더가 병을 공중으로 몇 바퀴 돌렸다. 병으로 몇 번 저글링을 한 뒤 술을 잔에 담았다. "탁!" 꽃무늬 자수가 박힌 청재킷을 입은 바텐더가 라이터를 켰다. 술에 불이 붙고 잔은 내 앞에 놓였다.

이제 20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대학 시절, 칵테일 한잔에도 불꽃이 필요했다. 머리를 노랗게 염색했던 그는 장르로 따지면 다양하고 화려한 기술을 써서 손님 눈길을 사로잡는 플레어 바텐더(flair bartender)였다.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이 클래식 바텐더(classic bartender)다. 깔끔하고 정중한 슈트를 차려입고 요란하지 않은 몸짓으로 손님을 맞는다. 클럽과 고깃집이 모여 있는 홍대 앞 삼거리 '디스틸(d.still)' 역시 클래식 칵테일바다. 평균 연령이 20대 초반에 가깝고 지갑은 가벼운 홍대 상권에 있을 법하지 않은 조합이다. 그러나 2010년부터 디스틸은 독야청청 오후 8시가 되면 문을 연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고 간판도 없는 이 집에 사람들은 밤하늘 구름처럼 조용히 모여든다.

초행길은 어렵다. 이 동네에 워낙 골목이 많고 이렇다 할 표지판도 없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지도를 켜고 발걸음을 옮기다 마침내 두껍고 어두운 나무문 앞에 섰다면 잘 찾아온 것이다. 그대로 무거운 문을 밀어보자. 그 안은 다른 세상이다. 뉴욕, 아마 시카고 뒷골목 바가 이렇지 않을까? 노랗고 어두운 불빛이 나무로 짜인 실내를 은은히 밝힌다. 앉을 곳을 찾아 고개를 돌리면 자연히 팔을 올려놓게 되는 높은 바, 작은 모임을 할 수 있는 테이블 하나가 전부다. 인원이 많지 않다면 바에 앉는 것이 좋다. 바텐더를 마주할 수 있어서 그렇다. 메뉴를 펼치면 몇 페이지에 걸쳐 영어로 된 술 이름이 적혀 있다. 앞을 바라보면 선반 가득 차 있는 술병이 보인다. 선택 장애로 의식이 코마 상태에 빠진다. 이럴 때는 바텐더의 도움을 받는 게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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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유에 새우와 채소를 넣어 끓이듯 익힌 디스틸의 스페인식 새우 요리 감바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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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게 좋을까요?"

바텐더의 임무는 우문현답이다. 열두 고개 넘어가듯 손님 취향을 조사한다. 평소에 어떤 술을 즐겨 마시는지, 단맛이 좋은지 드라이한 맛이 좋은지, 어떤 향을 좋아하는지, 몇 가지 질문을 거쳐 술 한 잔이 만들어진다. 잔당 1만8000원인 칵테일은 잔술로 치면 비싼듯하지만 한강 이남 가격대를 떠올리면 한 잔이라도 더 마시는 게 이익이란 계산이 선다.

찬 바람에 어깨를 움츠리는 날은 온화한 브랜디 베이스의 술을, 요즘처럼 몇 걸음에도 땀이 흘러내리는 날은 상큼한 진(gin) 베이스의 술이 잘 어울린다. 과하지 않은 몸짓으로 정중하게 술을 따르는 바텐더는 엄격한 법도로 몸을 움직이는 무사와 비슷하다. 칼을 휘두르듯 정확한 비율로 술을 조합하고 빠르고 날랜 몸짓으로 술을 섞는다. 그 맛은 일본 하이쿠(俳句)처럼 간결하면서도 긴 여운을 남긴다.

디스틸의 음식도 술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디스틸을 디스틸답게 만드는 것은 음식이다. 칵테일바에서 요리사를 따로 두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일식을 공부했다는 요리사의 실력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요리는 양 갈비 스테이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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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산 어린 양을 쓴 양갈비 스테이크. 고기 한가운데 핏기를 살리고 양면을 고르게 구운 솜씨가 일품이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뉴질랜드산 어린 양을 쓴 이 요리의 핵심은 정확한 굽기다. 투플러스 한우보다 지방은 적지만 어린 짐승 특유의 연한 육질과 양고기만이 가진 은근한 풀내음은 이 음식을 특별하게 만든다. 오래 구워 핏기가 사라지면 고기는 퍽퍽해지고 섬세한 향도 사라진다. 고기 한가운데 핏기를 살리고 양면을 고르게 구운 솜씨는 언제나 틀림이 없다. 곁들여 나온 매시드 포테이토는 버터의 고소한 풍미가 담백한 감자와 어우러져 단순하면서도 멋스러운 맛을 낸다. 음식의 배경이 되는 소금과 후추 간은 과녁의 중앙을 그대로 맞힌다.

고기가 싫다면 스페인식 새우 요리인 감바스가 대안이다. 껍질 벗긴 새우를 올리브유에 넣고 마른 고추 양파 등 향신료, 안초비 함께 끓이듯 익힌다. 다른 집 감바스보다 매콤한 맛이 덜하고 채소와 안초비의 단맛과 감칠맛이 조금 더 두드러진다. 둥글해진 맛은 술과 더 잘 어울린다.

배가 불러 간단한 안주가 필요하다면 감자튀김이 있다. 평범한 감자튀김도 이곳에서는 격이 다르다. 핵심은 오리 기름이다. 일반 식용유보다 끓는점이 높은 오리 기름 덕에 튀김은 더욱 바삭하고 단단하다. 곁들인 로즈메리 덕에 솔잎을 닮은 숲 향이 그윽이 퍼진다. 이 집 모든 음식은 목소리가 큰 기타가 아니라 뒤편에서 리듬을 맞추는 베이스를 닮았다. 그 잔잔한 결에 맞춰 진토닉을 곁들인다. 이 칵테일의 바탕이 되는 진은 장미와 오이 추출물로 빚은 헨드릭스(hendrick's)다. 한 모금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린다. 초여름 내리는 소나기같이 서늘하고 향긋하다. 디스틸 문밖으로는 그 향기가 새나가지 않는다. 바 카운터를 울리는 작은 말소리도 흘러나가지 않는다. 작고 단단한 그 성 안에서 바텐더는 성실히 술을 따르고 손님은 잠든 새처럼 고요히 앉아 있을 뿐이다.

디스틸: 칵테일(1만8000원), 양 갈비 스테이크(2만5000원), 감바스(1만5000원), 감자튀김(9000원), 항정살 구이(2만원). (02)337-7560



[정동현 음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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