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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friday] 안 그래도 짧은 점심, 주 52시간 시행되면 어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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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리와 오누키의 friday talk]

조선일보

한국인의 점심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시간대도 변했고, 메뉴도 슬슬 바뀌고 있습니다. 저녁이 있는 삶 못지않게 점심이 있는 삶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김미리(이하 김): '점심'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후다닥'이란 부사가 자동 연상돼요.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허겁지겁 해치우죠. 구내식당 배식대에 들어서면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부품 신세란 생각도 들고요. 오누키 상의 점심은 어떤가요?

오누키(이하 오): 요즘 제 점심은 회의예요. 낮 12시 15분부터 한두 시간 동안 제가 몸담은 논설실 회의가 시작되거든요.

: 12시부터 회의라고요? 점심은 그럼 어떻게 해요? 도시락 먹으면서 하나 봐요.

오: 밥은 회의 끝나고 각자 해결!

김:
너무해요. 다 먹고 살자고 일하는 건데 날마다 끼니 거르고 회의하다니.

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제가 아는 한국 친구들 반응이 어쩜 이리 똑같을까요. (웃음).

김:
직장인의 점심은 '업무의 쉼표', '스트레스 일단 멈춤' 시간. 그 금쪽같은 시간을 회의에 몽땅 써버리다니요. 매주 월요일 오전 11시 좀 넘어 부서회의를 해요. 정오 넘어 회의 끝나면 식당 가도 자리가 없으니 아예 도시락 회의를 하기로 했어요. 쫄쫄 굶으며 회의했다간 그 원성 감당 못 하죠.

오:
며칠 전 도쿄에서 한·일 양국 전문가들이 참여해 북한 이슈를 다룬 비공개 세미나가 있었어요. 낮 12시~오후 2시가 점심시간이었어요. 이것만 봐도 일정을 짠 게 한국 측이라는 게 보였어요. 일본은 세미나 같은 행사에서 점심이 1시간 이상인 경우가 드물거든요.

: 한국에선 점심 간담회나 오찬 겸한 행사가 딱 1시간인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 시간이면 밥도 못 먹고, 일도 못한다고 생각하죠.

: 점심이 길면 결국 그만큼 끝나는 시간이 늦춰지는 거잖아요. 전체 행사를 빨리 끝내려면 점심을 타이트하게 먹는 게 현명하죠.

: 주 52시간 근무가 도입되면서 점심 혼란에 빠진 직장인이 많아요. 점심시간을 업무시간으로 안 친다면서 아예 컴퓨터를 꺼버리는 곳도 생기고, 단축 근무를 하려고 점심시간을 확 줄이는 곳도 있어요. '혼밥'이 늘면서 오피스가의 점심 풍경이 바뀌고 있는데 주 52시간이 시행되면 급격히 변할 것 같아요.

: 일본 정부도 '일하는 방식 개혁'을 내세우고 있어요. 안 그래도 짧은 점심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모래알처럼 혼자 있기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인데 동료하고 밥 먹으면서 대화할 기회가 씨가 말랐어요. 업무 효율은 높아졌을지 몰라도 의사소통 문제가 커졌다는 지적도 나와요. 대면 장애 앓는 젊은 직장인도 많아졌고요.

: 일본 베스트셀러 작가 사이토 다카시가 저서 '내가 대화하는 이유'에서 말한 '대면력(對面力)'이 떠오르네요. '사람과 마주 보고 즐겁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죠. 직장인에겐 점심이 긴장하지 않고 자연스레 대면력을 기르는 훈련장이기도 할 텐데 그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네요.

: 그래도 한국은 낫죠. '점심만큼은 즐기자'는 분위기가 있잖아요. 일본의 낮 인사인 '곤니치와'에 해당하는 말이 '점심 먹었니'인 것 같아요. 처음엔 점심때 먹은 메뉴를 일일이 말하면서 왜 이런 것까지 물을까 싶었는데 그게 인사였어요. 그만큼 중요하단 말이겠죠.

: 온종일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데 점심때만은 만사 잊고 서로 최대한 방해하지 말자는 공감대가 있긴 해요.

: 일본에선 점심시간 1시간이 짧단 생각을 못했어요. 혼자 밥을 먹으니 밥 먹고도 쉴 짬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한국의 점심을 경험하니 과연 일본의 극단적인 혼밥 문화가 바람직한 건가 생각하게 돼요. 사람과의 교류가 뜸하니 이상한 사건·사고가 많은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가끔 시끌벅적한 한국의 점심이 그리워요.

: 점심 사역의 고통은 싫지만 혼밥의 냉랭함도 익숙해지진 않네요.

[김미리·friday 섹션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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