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5 (화)

`짝퉁 너바나? 그런지의 희망?" 성공과 좌절을 모두 맛본 영국산 밴드 `부시`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스쿨 오브 락-61] 미국 영화배우 키아누 리브스(Keanu Reeves)는 이제 명배우 반열에 오른 것 같다. 데뷔작 개념인 '스피드'만 하더라도 그냥 얼굴 잘생기고 훤칠한 미남 배우였던 그는 콘스탄틴, 데블스 에드버킷, 매트릭스 등을 거치며 탄탄한 배우의 커리어를 쌓아갔다(물론 명백하게 따지면 스피드는 그의 데뷔작은 아니다. 이전에도 코믹한 역할을 맡으며 다양한 영화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지금처럼 시크한 이미지와 어울리는 첫 작품은 스피드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리브스는 동양인의 관점에서 볼 때 묘한 매력을 지닌 배우인데 이는 그의 혈관에 동양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인과 하와이 원주민의 피가 섞인 혼혈이었다. 어머니는 영국인이다. 태어나기는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머리가 까만 이유다. 그는 겉보기와는 달리 매우 불운한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부모가 이혼해 어머니와 함께 살았고 극심한 방황을 겪으며 히피로 살았다. 밴드에서 베이스를 칠 정도로 음악을 좋아한다.

여담이지만 리브스의 삶의 궤적은 묘하게 조니 뎁(Johnny Depp)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나이대도 비슷하다. 뎁이 1963년, 리브스가 1964년 생이다. 뎁 역시 체로키 원주민의 피가 섞여들어간 케이스다. 그래서 그의 머리도 동양인처럼 흑색이다. 광대뼈가 두드러진 것도 체로키 원주민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뎁이 영화배우로 데뷔하기 전 밴드에서 기타를 치던 로커였다. 뎁은 젊은 시절 마약중독으로 고생을 많이 했는데, 리브스와 뎁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반항아적 이미지의 허무함. 이런 이미지는 젊은 시절 방황했던 그들의 과거 유산이 남아있는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매일경제

Gavin Rossdale of Bush /사진=wikimedia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서론이 길었다. 이번 글에서 리브스와 뎁 얘기를 주로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번 글의 주인공은 리브스와 연관이 있다. 그가 출연했던 콘스탄틴에서 악마로 분한 영화배우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발타자르(Balthazar). 사탄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빌려 현실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애쓰는 악마 역할로 분했다. 단정한 포마드 머리에 핏이 딱 맞는 양복을 입은 그는, 손가락 사이로 큰 코인을 굴려가면서 영화를 본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가 나온 분량은 많지 않았지만 잘생긴 얼굴에 군더더기 없는 몸매로 연기하는 그는 당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이 배우가 바로 영국 밴드 부시(Bush)의 프런트맨으로 활약한 개빈 로스데일(Gavin Rossdale)이다. 그리고 부시는 포스트 그런지 시대를 열어젖히며 1990년대 중반 최고의 인기를 끈 밴드라 할 수 있다.

부시는 1992년 결성된 밴드다. 데뷔 당시에는 나이절 펄스퍼드(Nigel Pulsford)와 로스데일, 데이브 파슨스(Dave Parsons), 로빈 굿리지(Robin Goodridge)가 멤버였다(이 멤버는 이 밴드가 2002년 깨지고 2010년 재결합하면서 로스데일과 굿리지, 그리고 크리스 트레이너(Chris Traynor)와 코리 브리츠(Corey Britz)로 바뀐다).

식스틴 스톤(Sixteen Stone)이라 이름을 붙여 1994년 내놓은 데뷔 앨범은 엄청난 성과를 기록한다. 1994년은 그런지 음악에 심취한 사람들에게 엄청난 이벤트가 벌어진 해였다. 그해 4월 5일 너바나(Nirvana)의 리더, 커트 코베인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추모 열기가 불꽃같이 일어나며 너바나에 대한 간절함이 극에 달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영국에서 건너온 부시라는 밴드는 너바나와 묘하게 닮아 있었다. 너바나의 코베인은 그런지 색채가 짙게 깔린 외피에 쏙쏙 감기는 멜로디를 잘 뽑아내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코베인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수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부시가 그랬다. 부시는 데뷔 앨범을 내기 전 까지만 하더라도 그런지 밴드라고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여러 과정을 거치며 그런지 밴드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이런 가운데 코베인이 죽은 1994년 너바나의 닮은 영국산 밴드가 가요계에 데뷔했다. 부시의 음악 역시 그런지의 껍데기를 쓰고 너바나보다 더 귀에 착 감기는 멜로디로 청자를 유혹했다. 그리고 밴드의 프런트맨 로스데일은 코베인과 비교가 될 만큼 미남이었다. 턱까지 간당간당하게 떨어지는 곱슬머리, 디스토션이 걸린 듯한 우울한 목소리 역시 코베인과 로스데일을 한데 묶는 공통 요인이었다. 너바나를 그리워하던 팬심이 일거에 부시로 몰릴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셈이다.

부시의 데뷔앨범은 이런 경로를 통해 미국을 강타했다. 이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4위까지 오른다. 시작은 미미했지만 요새로 치면 차트 역주행을 펼친 셈이다. 글리세린(Glycerine) 컴다운(Comedown) 등의 노래가 히트하며 앨범 차트 순위가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한국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한 것은 생각할수록 엄청난 대박이다. 불과 몇 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순간이란 생각이 든다. 데뷔 앨범으로 1994년 빌보드 4위에 오른 부시를 24년이 흐른 지금 아직도 일부 한국 팬들이 기억하고 있는데, 24년이 지난 후에 한국이 아닌 어떤 나라의 누군가가 어떤 모습으로 방탄소년단을 기억하고 있을지 미래가 궁금해진다).

1996년에 나온 두 번째 앨범, 레이저블레이트 슈트케이스(Razorblade Suitcase)도 상당한 성과를 거둔다. 이 앨범 타이틀곡은 스왈로드(Swallowed)로 무려 7주 동안 빌보드 모던락 차트 1위를 차지했다. 두번째 싱글 그리디 플라이(Greedy Fly)도 인기를 끌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앨범은 독설 음악평론가로도 이름이 알려진 스티브 알비니(Steve Albini)가 프로듀서를 맡았는데(참고로 그는 프로듀싱이란 단어를 개인적으로 매우 싫어한다고 한다. 까다롭고 별난 캐릭터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너바나의 인 유테로(In Utero)에 펑크 느낌을 십분 불어넣는 데 한몫했다. 그리고 3년 뒤에 너바나와 닮은 부시의 앨범과 함께한 것이다.

부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부시를 놓고 '짝퉁 너바나'가 아니냐며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프로듀서 개념으로 초빙된 사람마저 같으니 이를 아니꼽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좋은 먹잇감인 셈이었다. 일단 시장의 기대는 날 선 비판을 잠재울 만큼 뜨거웠다. 이 앨범은 부시에게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의 영예를 안겨준다.

하지만 너바나와 닮았다는 세간의 비판은 이들에게 적잖은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다. 이들이 홈그라운드인 영국에서 별 인기를 끌지 못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영국산 밴드이지만 영국 특유의 밴드가 갖고 있는 감성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들은 세 번째 앨범에서는 기존 작품과 전혀 다른, 일렉트로닉이 듬뿍 담긴 음악을 시도한다. 아마도 너바나의 보이지 않는 유산으로부터 탈피하고 싶은 갈증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새로운 시도는 팬들을 만족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부시는 세 번째 앨범을 내놓고 해체의 길을 걷는다. 부시가 다시 세상에 이름을 알린 것은 2010년이었다. 앞서 거론한 새 멤버로 재결성해 앨범 두 장을 더 낸다. 빌보드 록 부문 1위에 오른 사운드 오브 윈터(Sound of Winter) 같은 곡도 배출했지만, 1990년대 영화를 그대로 누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들의 실력이 떨어졌거나, 새로 들어온 멤버가 별로여서가 아니다. 세월이 지났기 때문이다.

로스데일은 노 다우트의 여성 보컬 그웬 스테파니(Gwen Stefani)와 결혼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노 다우트는 돈 스피크(Don't speak)란 곡으로 한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밴드다. 둘은 로스데일의 불륜 문제로 2015년 이혼했다. 밴드 노 다우트와 스테파니에 대해서는 추후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홍장원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