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0.05 (토)

[박재현의 ‘한 발 멀리서’]대한항공의 가이포크스, 삼성공화국의 촛불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 6월항쟁을 다룬 영화 <1987>에서 연희(김태리)의 이 대사는 부당한 권력에 대한 불복종을 그린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서도 변주된다. 가이포크스 가면을 쓴 브이(V)에게 그가 방송에서 밝힌 계획, 즉 의사당을 폭파하는 것이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이비(내털리 포트먼)는 묻는다. 이 대사는 깨지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한 그들의 성채 앞에 선 소시민들의 주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꿨다. 항쟁의 현장에서 연희가 기어코 버스에 오르듯, “세상이 엉망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두려움에 숨죽이던 이비 역시 브이의 ‘혁명’에 동참하게 된다.

경향신문

지난 주말 굵은 빗방울 속에서도 가이포크스 가면을 쓴 대한항공 직원 400여명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 총수일가의 퇴진을 외치는 촛불집회를 이어갔다. 단언컨대 조현민의 ‘물벼락 갑질’로 드러나기 시작한 각종 의혹들은 ‘단죄’받을 것이다. 검찰, 경찰, 국세청, 관세청 등 대한민국 최고 사정기관들이 총출동하고 국토교통부, 공정거래위원회, 법무부 등 규제기관들이 전방위적 조사에 나서서가 아니다. 총수일가가 괴성을 지르고 서류뭉치를 내동댕이치고, 물컵을 던져도 참고 참아야 했던 직원들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직장 문화에서 노조원도 아닌 직원들이, 노동조건 개선이 아니라 회사를 살리기 위해 총수뿐 아니라 그 일가를 향해서도 퇴진을 요구하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이다.

사실 총수 혼자 재벌 체제를 유지할 수는 없다. 기이한 괴성에 폭력적 인성을 지닌 조 회장 일가가 대한항공을 황제처럼 지배했던 것은 한국 사회 기득권층의 강력한 카르텔이 있기에 가능했다. 정치권, 정부 관료, 언론, 나름 시장주의를 강변하는 지식인들이 재벌에 협력해줘야 한다. 미국인인 조현민이 항공법을 위반하면서 진에어 등기이사로 재직한 것은 면허 취소에 해당하는 사안이다. 지난 6년간 국토부가 방조했거나 묵인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국토부는 땅콩회항 직후 용역보고서를 통해 대한항공의 경영구조를 가장 잘 알고 있던 터였다. 밀수와 조세 포탈이 지속적으로 이뤄졌다면 관세청의 직무유기다. 내부 감시 기능을 해야 할 사외이사 상당수는 조 회장과 친분이 있는 법률가, 교수들이었다. 이들에게 견제와 감시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재벌과 기득권의 긴밀한 관계는 삼성에서 여실히 확인된다. 삼성 컨트롤타워의 2인자였던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사장의 휴대전화 문자들이 그 증거였다. 입법부와 사법부,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국회, 언론사, 대학교수 등과 주고받은 문자에는 각종 수사 정보와 인사청탁, 골프장 부킹부터 충성 서약까지 망라돼 있다. 이를 보도한 뉴스타파는 “삼성은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를 손에 쥐고 있었고, 삼성이 원하는 것을 확인해 전달해 주는 이른바 빨대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 있었다. 왜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오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들”이라고 밝혔다.

삼성이 그동안 불법으로 노조 파괴 작업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도, 금융실명제를 위반하며 차명계좌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도, 설립 직후 적자를 면치 못하던 기업을 갑자기 우량 기업으로 탈바꿈시키도록 기준을 바꿀 수 있었던 것도 끈끈하게 구축된 인적 네트워크 덕이었다. 재벌의 단단한 카르텔은 재벌 개혁을 번번이 무력화시켰다.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에 시민들은 촛불을 들었다. 춥고 어두운 밤을 따뜻하게 비췄던 촛불은 국정농단에 “재벌도 공범”이라고 외쳤다. 그 촛불은 권력을 바꿨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요구하고 있다. 기존의 재벌 봐주기와 친기업 관행들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이유다. 지금 삼성과 한진을 요란하게 들쑤시고 있는 대한민국의 사정기관과 규제기관들은 원래 그렇게 스스로 알아서 하는 곳이 아니다. 정치권력을 바꾼 시민의 힘이 그들을 움직인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의 현상은 ‘삼성 때리기’나 ‘을의 반란’이 아니라 그동안 재벌의 탈법과 편법을 가능하게 했던 보호막이 사라지고 있는 결과로 보는 것이 옳다. 우리는 그 광경을 지난 2주간 주말 저녁마다 보고 있다.

‘세상이 달라질까’라는 의구심에 가면 속 주인공은 “건물에 권위를 부여한 국민이 힘을 합쳐 그것을 파괴함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마침내 시민들은 가이포크스 가면을 쓰고 의사당으로 행진했고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 속에서 의사당은 화려한 불꽃 속에 몰락한다. 불꽃을 보며 이비는 브이가 누구였는지 말한다. “그는 나의 아버지였고 또 어머니였어요. 내 형제였고 친구였고요. 당신이자 나였으며 우리 모두였어요.” 광화문과 서울역 광장에서 가이포크스 가면을 쓴 대한항공 직원들이 그렇다.

<박재현 산업부장>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카카오 친구맺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