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시작은 이랬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몰카가 한 장 올라온다. 대학의 크로키 수업에서 찍힌 누드 사진이었다. 커뮤니티 유저들은 그 사진을 보고 낄낄거리며 피해자를 희롱했다.
2014년까지 이런 정도의 사진은 그저 ‘보고 즐길 수도 있는 포르노’로 여겨졌다. 범죄라는 인식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2015년 메갈리아 이후 여성들은 몰카 촬영과 공유가 개인의 존엄을 침해하는 범죄임을 강조하고 ‘디지털 성범죄’ 혹은 ‘불법촬영범죄’로 재명명했다.
더불어서 ‘몰카’가 범죄로 인식될 수 있었던 것은 디지털성폭력대항단체인 DSO와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등 청년 여성들로 구성된 단체의 활동 덕분이었다. 그렇게 달라진 인식 속에서 2018년 5월에 벌어진 이 ‘크로키 모델 사건’은 크게 화제가 된다.
경찰은 유례없이 발 빠르게 행동했고, 사건 발생 열흘 만에 범인을 잡아 포토라인 앞에 세웠다. 놀라운 일이었다. 언론은 신이 났고, 사람들은 돌을 던질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페미니즘이 세상을 바꾼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범죄인지 몰랐던 것을 범죄라고 각성시킨 것은 확실히 페미니즘의 역할이다. 다만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 피해자가 남성이었고, 가해자가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2017년 기준 ‘불법촬영범죄’ 가해자 98%가 남성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좀 특이한’ 사건이었던 셈이다.
지금 국민들은 바로 이 문제를 질문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부터 반대의 경우에도 이처럼 기민하고 엄정한 대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까지는 그토록 무능했던 경찰이 이번 사건에서야말로 자신의 유능을 입증하지 않았는가?
나는 지금 이 글을 30만1487명의 대한민국 국민과 함께 쓰고 있다. 이는 2018년 5월14일 오전 9시36분 현재, 청와대 국민청원 페이지에 올라온 “여성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성별 관계없는 국가의 보호를 요청합니다”에 참여한 이들의 숫자다. 이 청원에서 국민들은 “동일범죄 동일수사 동일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동일범죄 동일수사 동일처벌. 이는 페미니즘의 그 유명한 구호인 ‘동일노동 동일임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남성과 여성에게 동일한 노동이 허락되지 않는 구조를 문제 삼고, 동일한 노동을 하더라도 그 노동력이 같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저항한다.
2018년 대한민국의 노동시장에서 남성과 여성은 여전히 불평등하다. 얼마 전 밝혀진 국민은행과 KEB하나은행 채용비리 사건은 하나의 예일 뿐이다.
국민은행은 채용과정에서 남성 지원자 100명의 서류전형 점수를 높여주었고, KEB하나은행은 합격자 성비를 남성 4 대 여성 1로 맞추기 위해 점수를 조작했다. 그 결과 여성 커트라인이 남성 커트라인보다 48점이나 높아졌다. 그야말로 성별이 스펙인 셈이다.
이 사건을 보고 “기업이 뽑고 싶은 사람을 뽑는다는데, 그게 문제인가?”라고 질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정체성이나 신체적 특징 등 한 개인의 특성에 따라서 기회를 박탈하고 선택을 제한하며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을 민주주의사회에서는 ‘차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를 막기 위해 국가는 법을 만들어 차별 행위를 처벌한다. 하지만 우리는 법도 믿을 수 없는 사회를 산다.
“유○무죄 무○유죄”라는 구호가 등장한 것은 대한민국이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차 실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디지털 성범죄에 있어서 늘 뭉그적거렸던 경찰이 전광석화와도 같이 움직인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피해자가 남자여서? 가해자가 여자여서? 혹은 언론의 관심이 남달랐기 때문에?
이유가 무엇이든 ‘남성’이라는 성별이 파워가 되어 공정한 법 집행을 막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민은 요구한다. 동일한 범죄에 동일한 수사와 처벌을.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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