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전체에는 평화체제가 도래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 사회 내부적으로는 적대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는 이질적인 것들의 상생적 공존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의 문제를 아직 충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오랜 분단체제 때문에 그동안 ‘타자’를 포용하지 못하고 배제하며 혐오하고 적대하기까지 하는 ‘전쟁문화’가 아주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단지 이념뿐만 아니라 지역, 계층, 젠더 등을 둘러싸고서도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냉전적 유형의 갈등이 일상이 되었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제대로 된 정착을 위해서라도 이런 ‘우리 안의 냉전’부터 극복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사회의 다양한 세력들이 서로 갈등한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민주주의와 정치의 영원한 본성에 속한다고 해야 하고, 지역, 계층, 젠더 등의 차이를 둘러싼 불협화음도 어떤 사회에서든 있을 수밖에 없다. 존재하는 갈등을 억누르기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그런 갈등의 불가피성을 수용하고 인정하면서 그것이 모두의 공멸이 아니라 상생과 번영으로 이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것인가이다.
마키아벨리의 구분을 빌리자면, 사회적 갈등은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만 끝까지 관철시키려 드는 ‘투쟁’이 아니라 모두의 이익과 관점이 반영된 공동의 삶의 질서를 낳을 수 있는 ‘논쟁’이 될 때 공동체의 번영을 위한 토대가 될 수 있다. 이런 논쟁의 가장 기본적인 규범은 공정성과 상호존중이다. 누구에게든 틀리더라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상대를 타도해야 할 적이 아니라 단지 생각과 처지가 다른 동반자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공동의 삶의 틀 자체를 깨지 않는 한 그 어떤 이견이나 차이도 존중하고 상대를 폭력적 절멸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포용의 원칙’으로 이어진다. 그런 바탕 위에서만 갈등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지금 제1야당 대표라는 인사가 바로 이런 규범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빨갱이’ 같은 말을 서슴없이 내뱉으며 배제의 정치를 선동하고 있다. 그런 관용의 규범은 사실 이 당이 신줏단지 모시듯 한다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적 관용의 체제는 그런 불관용을 선동하는 행위를 단호하게 불관용할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라도 이런 당이 더 이상 설 곳이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조선일보는 검인정 역사교과서 서술 지침을 놓고 또 케케묵은 이념시비를 걸고 있다. 이렇게 특정 진영이 ‘유일하게 올바르다’고 여기는 역사관만 미래 세대에게 전수해야 한다는 발상 역시 그 규범을 부정한다. 이 때문에 진보 쪽에서 또 다른 올바른 역사관을 내세우며 맞서는 것은 옳지 않다. 가령 1948년 8월15일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로 할지 아니면 건국일로 할지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합리적인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해법은 분명하다.
“학문과 정치에서 논쟁적인 것은 수업에서도 역시 논쟁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독일의 좌우 정치진영이 소모적인 이념 논쟁 너머에서 미래 세대가 올바른 민주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정치교육’을 하자면서 이끌어 낸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핵심 원칙이다. 이 사안에 대해서는 이런 의견도 있고 저런 의견도 있다, 근거는 각기 이러저러하다, 옳고 그름은 학생들이 스스로 따져서 판단하라, 바로 이런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자는 것이다. 이런 ‘논쟁성의 원칙’으로 이제 무의미한 ‘역사전쟁’을 끝내야 한다.
민주주의를 단순히 다수결주의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승자독식의 원리를 따르는 다수결은 정치적 의사결정에서 시간적 제약 등에 따른 실용적 필요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지 그 자체로 민주주의는 아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다수결주의 너머에서 사회를 통합시킬 수 있는 심층 합의가 필요하다. 그동안의 반공안보체제는 우리 사회가 민주화 이후 30년이 넘도록 포용의 원칙 같은 가장 기본적인 다원적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합의조차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하게 했다. 이제 바로 그런 합의를 이룰 때가 되었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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