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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금)

평화의 기운으로 다시 도는 ‘고장난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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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북-미 정상회담 앞둔 현 정세 분석과 전망’

이혜정 교수와 구갑우 교수의 대담




“백주몽(깨어 있을 때 나타나는, 꿈과 비슷한 의식 상태)과 같은 11분간의 휴전협정 조인식은 모든 것이 상징적이었다.”

한국전쟁의 총성을 멈춘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조인식 현장을 취재했던 ‘전설의 전쟁기자’ 최병우(그는 1958년 9월 중국-대만 무력분쟁 취재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기이한 전투의 정지’란 르포 기사를 이렇게 시작한다. 세계적인 관심을 반영하듯, 유엔 쪽 기자단만 100여 명이 몰렸단다. 참전국이 아닌 일본에서도 기자 10여 명이 취재에 나섰다. 최병우는 “한국인 기자석은 둘뿐이었다. …휴전회담에 한국을 공적으로 대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이리하여 한국의 운명은 또 한 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되는 것이다”라고 썼다.

오전 10시께 윌리엄 해리슨 미 육군 중장과 남일 조선인민군 대장이 각각 국제연합군과 조선인민군·중국인민지원군을 대표해 220평 남짓한 조인식장에 따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한국어·영어·중국어 세 언어로 작성된 협정문서 정본 9통과 부본 9통, 총 18통의 문서에 서명을 시작했다. 서명을 마친 문서는 교환해, 상대방 이름 옆에 다시 서명을 해야 한다. 최병우는 이렇게 썼다.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12분

한겨레21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첫발은 잘 디딘 것 같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앞줄 오른쪽)이 두 번째 방북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을 만나 환하게 웃으며 걷고 있다. <노동신문>은 다가오는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해 ‘만족한 합의’를 했다고 5월10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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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슨 장군과 남일은 쉴 새 없이 펜을 움직인다. 각기 36번 자기 이름을 서명하여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의식에 따르는 어떠한 극적 요소도 없고… 화해의 정신도 엿볼 수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전’이지 ‘평화’가 아니라는 설명을 잘 알 수 있었다.”

모든 문서에 서명을 마친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조인식장을 빠져나갔다. 의례적인 기념촬영조차 하지 않았다. 최병우는 그 시각을 ‘10시12분’으로 기록했다. 한반도가 냉전의 덫에 갇혀버린 시각, 한반도 정세란 시계가 멈춰버린 시각,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12분이다.

그로부터 65년 세월이 흘렀다. 기적처럼 초침과 분침이 잠시나마 움직이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내 꽁꽁 얼어붙었다. 그 긴 세월 제자리걸음만 반복했다. 불과 넉 달 남짓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2018년 1월1일부터다. ‘고장난 시계’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초침과 분침이 분주히 움직이더니, 마침내 시침도 돌았다. 꿈처럼 찾아온 평화의 기운이 한반도의 동면을 깨우고 있다. 4·27 남북 정상회담을 넘어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이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다. 세계사적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이혜정 중앙대학교 교수의 말이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노력하고 바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여러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한반도에서 전쟁은 안 된다. 지금까지 동북아 정세는 한국이든, 중국이든, 일본이든, 북한이든 모두 미국 중심으로 부챗살을 형성하면서 움직여왔다. 하지만 이제는 각국이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움직인다. 사실상 냉전체제 해체의 첫 번째 단계가 시작된 것이다. 되돌아갈 수는 없다. 이미 물꼬가 한번 트였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장애물은 있겠지만, 과거로 되돌아갈 수준의 역사적 움직임은 아니다.”

“북-중 군사동맹이 복원됐다는 뜻”

한겨레21

‘격동의 한반도, 세계가 주목한다.’ 북한에 억류됐다가 풀려난 한국계 미국인 3명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 두 번째)의 환영 속에 5월10일 밤 미 메릴랜드주 앤드루스 합동기지에 도착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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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7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중국 랴오닝성 항구도시 다롄을 방문했다. 3월 첫 번째 방중 때와 마찬가지로 비밀리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리수용·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과 리용호 외무상, 김여정 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최선희 외무성 부상을 비롯해 북한의 대외관계를 이끄는 핵심 인사들이 대거 동행했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의 말이다.

“미국의 해상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이 자체 제작한 항공모함 진수식이 열리는 다롄에서 김 위원장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났다.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사실상 사문화했다는 평가를 받아온 북-중 군사동맹이 복원됐다는 뜻이다. 또 다롄은 공업과 항만 등이 발달한 중국 동북 지역에서 개혁·개방을 상징하는 중요한 도시다. 과거 러시아의 조차지이기도 했고, 일제가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만든 남만주 철도주식회사의 본부가 자리했던 국제도시다. 북한으로선 과거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다녀갔던 장소이기도 하다. 김정은 위원장의 수행원들이 다롄 항구와 기업체를 둘러본 것으로 알려졌다. 북-중 동맹의 복원과 개혁·개방 행보란 두 가지 측면에서 상징적이다. 덧붙여 북한은 과거 1960년대 중-소 분쟁이 격화했을 때, ‘등거리외교’를 추진한 경험이 있다. 중-소 양국과 동맹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양쪽에 ‘보험’을 들었다. 4·27 판문점 선언에서 남북이 ‘운명공동체’라고 얘기했는데, 이번 방중 결과를 전한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보면, 북-중 관계를 ‘하나의 운명으로 결합시킨 혈연적 유대’라고 표현했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중-미 두 나라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추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돌이켜보면, 3월 하순부터 이어진 한반도 주변 정세는 숨 가쁘기까지 하다. 3월25일 열차편으로 평양을 출발한 김 위원장의 1차 방중에 이어, △마이크 폼페이오 미 중앙정보국장(현 국무장관) 방북 △남북 정상회담 △김 위원장 2차 방중 △폼페이오 장관 2차 방북과 미국인 억류자 3명 석방 △한-중-일 3국 정상회담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월10일 자정 무렵(한국시각) 트위터에서 북-미 정상회담 일정과 장소를 확정 발표했다. 북한과 미국이 움직이는 속도감에 주눅이 들 지경이다. 이혜정 교수의 말이다.

북한의 체제 안전 보장해줄 수 있을까

한겨레21

지난 3월 하순에 이어 중국을 전격 방문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이 랴오닝성 다롄의 바닷가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통역만 배석한 채 얘기를 나누고 있다. 신화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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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시절 미국이 중국·소련과 진행했던 화해(데탕트) 과정을 보면, 긴 기간이 걸렸다. 중국만 봐도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이 중국을 처음 방문한 게 1972년이지만, 공식 수교는 1979년에야 이뤄졌다. 미국 국내정치적으로 엄청난 반대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대만관계법’ 입법이다. 소련과의 화해 무드는 헨리 잭슨 상원의원(민주당-워싱턴주)이 인권과 무역을 앞세워 단기필마로 무너뜨렸다. 결국 미국이 냉전 시절 중국과 소련을 어떻게 대우했는지 살펴보면, 현 정세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다. 국내 보수 진영도 그렇고, 지금 미국의 주류 세력은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할 의지가 있느냐고 묻는다. 거꾸로 물을 수 있다. 실제 핵무기로 미 본토를 타격할 능력이 있던 중국과 소련도 대등하게 대우한 적이 없는 미국이 과연 북한의 체제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을까? 미 주류의 시각에서 ‘나라도 아닌 나라’인 북한과 같은 나라와 일대일로 안보 문제의 담판을 지은 사례는 미국 외교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의 전격적인 북-미 정상회담 수용 이후, 미국 내에선 역풍이 거세다. 핵·미사일뿐 아니라 생화학무기를 비롯한 모든 대량살상무기까지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인권도 반드시 협상 의제에 포함해야 한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한 달여 만에 두 번째 방북길에 오른 폼페이오 장관의 행보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구갑우 교수의 말이다.

“담대한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내정자 시절 북한의 체제 안전을 위해선 ‘종이 뭉치 이상’을 줘야 한다고 얘기했다. 종이 뭉치에는 북-미 수교와 평화협정이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론 어떤 군사적 조처를 하느냐가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북한이 비핵화 절차에 들어가는 시점에 미국 쪽에 한반도에 항공모함·핵잠수함·전략폭격기 등 이른바 ‘전략자산’을 전개하지 말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한-미 연합훈련 연기와 핵·미사일 시험발사 유예를 맞바꿔 지금의 정세를 만들어낸 것처럼, 일종의 ‘등가교환’이 이뤄질 수 있다는 얘기다. 김 위원장은 1차 때와 마찬가지로 2차 방중에서도 ‘단계적-동시적’ 해법을 재차 강조했다.”

지난 5월8일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핵협정’ 파기를 공식화한 것은 다가오는 북-미 정상회담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2015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국이 모두 참여해 이란과 맺은 핵협정마저 일방적으로 무력화한 미국을 북한은 믿을 수 있을까? 한반도 냉전체제 해체의 결정적 고비가 될 북-미 정상회담까지는 고작 한 달이 남았다. 이혜정 교수와 구갑우 교수의 ‘이구동성’이다.

“북한이 비핵화로 가기 위한 ‘종이 뭉치’ 이상의 실질적 조처가 필요하다. 마지막 의제 조율 과정에서 ‘해법’을 찾는 게 관건이다. 담대한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안 된다.”

대담 이혜정 중앙대학교 교수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정리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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