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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 (수)

[이광형 칼럼]영원한 유도인 의암(毅岩)강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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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인의 영원한 스승~제자들이 마련한 감동의 팔순잔치 '만수무강 큰절'

박종학 조인철 전기영 등 세계정상급 선수 20여명 길러낸 입지전적 인물

뉴스1

의암 강형원 선생 (충북도유도회 제공)©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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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ㆍ세종=뉴스1) 이광형 기자 = 지난 주말(12일) 원로 유도인 의암(毅岩) 강형원 선생의 팔순 잔치에 다녀왔다. 필자와 인연은 고등학교 때 은사로서 유도인들의 추앙을 받는 ‘거물’로 뜻 깊은 자리였다.

80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체력이나 어떤 결정을 하는 사고력이 놀라울 정도다. 국내 몇 안 되는 9단의 고단자로 숱한 경험과 겸손에서 나오는 언행은 경지에 오른 인격체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그는 충북 체육계 뿐 아니라 유도계에서 ‘어른’이란 칭호와 함께 ‘유도인의 영원한 스승’으로 존경을 받는다. 이날도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지역체육계 인사들을 비롯해 500여명의 제자들과 유도인들이 자리를 함께하며 ‘만수무강’을 비는 큰절을 올렸다.

무엇보다 팔순연의 의미가 너무나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의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나서 스승의 은덕(恩德)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준비했다는 것이다. 환갑을 넘어 현직을 은퇴한 제자에서부터 지금도 선수육성을 위해 땀 흘리는 제자들까지 동참했다.

의암은 음성 맹동에서 출생해 한국유도대를 졸업한 직후인 1964년 유도인 양성소로 불리던 청석학원(현 대성학원)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92년 퇴직 때까지 35년여간 청소년 선수육성에 온몸을 바쳤다.

이후엔 충북유도회장, 대한유도회 심판위원장, 한국중고연맹회장, 한국유도원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에도 대한유도회 승단심의위원장을 맡는 등 원로로서 역할을 주저하지 않고 있다. 60여년을 유도판에서 살아온 삶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지도자 생활은 열정과 치열함의 대명사였다. 당시 한국사회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운동은 대부분 가정환경이 어려운 자녀들의 전유물이었다. 때문에 선수 발굴과정에서 가난 때문에 청주로 유학이 어려운 학생들은 어려운 신혼살림에 함께 숙식을 하며 애정어린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는 세계를 놀라게 했고, 청주를 ‘국제유도의 메카’로 만들었다. 한국 유도사상 첫 세계유도선수권대회(1980)를 제패한 박종학(현 청주대교수)과 함께 이 대회 2연패(1994~6)에 이어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최성환·조인철(용인대교수) 전기영(〃) 등이 그가 길러낸 대표적 옥동자다.

세계 정상급 선수를 무려 20여명을 길러 냈다. 이들이 올린 성적은 국내 대회를 차치하고 국제대회에서 80여 차례 입상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하며 국위선양에도 기여했다. 지금도 200여 명의 제자들이 국가대표 감독과 일선 학교, 실업팀 등에서 지도자로 선수육성하는 건 의암이 남긴 유산이다.

가히 입지전적인 업적이다. 유도인으로서 그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건 무엇일까. 다름아닌 스승으로서 자기희생을 감내한 열정과 신뢰였다.

선수를 지도함에 있어서는 뜨거운 열정으로 치열하게, 그리고 신뢰를 교감했기 때문이다. 모든 선수는 빈부와 관계없이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과정을 거쳐 인성을 함께 지도한 결과물이었다.

‘선생과 스승’은 같은 듯 하지만 다르다. 선생은 학문을 주로 가르치지만 스승은 학문에 인성까지 함께 가르치는 것을 애써 찾는다. 의암은 단순한 선생이기를 거부하고 ‘스승’을 선택해 엎어치기만이 아닌 인간의 도리인 인성을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아름다운 팔순을 맞이할 수 있었다. 효(孝)·예(禮)가 부쩍 떠오르게 하는 가정의 달을 맞아 교훈의 삶으로 체육인들에게 울림을 주는 의암의 인생역정이 이전투구의 정치 현장에도 알려져 ‘각성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12khle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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