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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 (화)

[TOPIC] ‘싸움꾼’ 美 엘리엇에 판 깔아준 정부-ISD(투자자-국가 간 소송)송 으름장 국민연금·현대차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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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이 한국 정부와 날 선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엘리엇은 최근 삼성물산 합병과 관련해 한국 정부를 상대로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 카드를 꺼내 들었다. 삼성물산 합병 관련 손해를 보상받기보다는, 지배구조 관련 주주총회가 임박한 현대차그룹을 압박해 시세차익을 극대화하겠다는 게 엘리엇의 노림수로 보인다.

매경이코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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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 확대하는 엘리엇

▷성동격서식 판 흔들기…검찰도 맞불

엘리엇은 현대차 지배구조 시비와는 별개로 돌연 한국 정부와 법률 공방을 시작했다.

최근 엘리엇은 “3년 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한국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해 손해를 봤다”며 법무부에 손해를 배상해달라는 취지의 중재의향서를 냈다. “한국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상 투자자-국가 간 소송에 나설 방침”이라며 한국 정부를 압박했다.

엘리엇의 도발에 발끈한 듯 검찰 역시 맞불을 놨다. 서울남부지검은 삼성물산 지분 매입 과정에서 대량 보유 공시를 하지 않은 혐의(자본시장법 위반)로 엘리엇 측 업무 담당자들에 대한 소환을 통보했다.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상장법인이 발행한 주식을 5% 이상 보유하게 된 경우 이를 5일 이내 공시해야 한다. 엘리엇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인수합병(M&A) 당시 2015년 5월 27일 합병 반대 의사를 밝힌 후 6월 2일 지분 4.95% 보유를 공시한 데 이어 6월 4일에는 지분 7.12%를 보유 중이라고 밝혔다. 불과 이틀 만에 삼성물산 340만주(2.17%)가 늘어난 것인데 검찰은 이 과정에서 파생금융상품을 악용해 몰래 지분을 늘린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관건은 중재의향서를 접수한 한국 정부가 엘리엇의 도발에 응하느냐다. 결론부터 말하면 가능성은 높지 않다. 법무부 입장에서는 다퉈보지도 않고 엘리엇에 거액의 합의금을 덜컥 내줄 이유가 없다. 법무부는 2012년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의 중재 요청도 거부했다. 엘리엇은 법무부에 제출한 중재의향서에 7000억원 규모 손해배상 청구액을 적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무부가 중재를 거부하면 엘리엇은 중재의향서 접수 3개월 이내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ISD를 제기할 수 있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는 “ISD는 정부의 정책 변화에 따른 손해를 입을 때 제기하는데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이 정책 변화에 따른 것이라고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다”며 국민연금은 정부가 아니라 대주주였다는 점, 법원도 합병과 관련해 삼성 측 배임 혐의에 대해 무죄 판단을 내린 점, 엘리엇이 합병 성사 여부에 따라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입증할 방법이 없는 점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특히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으로 국민연금과 엘리엇 등 투자자들이 손해를 봤다는 대목은 판단하기 모호하다는 분석이다.

▶국민연금, 엘리엇 도발로 다시 시험대

▷서스틴베스트는 모비스 분할합병 반대

최근 엘리엇의 잇단 도발은 삼성물산 합병 관련 홍역을 치렀던 국민연금을 정면으로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안이 확정되려면 5월 29일 예정된 모비스 주총을 통과해야 한다. 합병은 주총 특별결의 사항으로 의결권 주식의 3분의 1 이상 참석, 참석 지분의 3분의 2가 동의해야 한다. 현재 현대모비스 특수관계인 지분은 31.1%, 외국인 지분은 48%, 국민연금은 9.8%가량 된다. 주총에 대략 80%가 참석한다고 가정하면 특수관계인 지분을 제외하고 외부 주주 16% 이상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민연금 향방에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다. 현재로서는 국민연금 내부적으로 결정을 내리기보다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의결권 자문위원회가 최종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

2년 전 삼성물산 합병 때처럼 국민연금 셈법은 복잡하다. 현대차 측이 계획하는 모양새는 현대모비스를 핵심 부품 사업(존속 부문)과 모듈·AS 부품 사업(분할 부문)으로 분할하고 분할 부문을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는 것이다. 증권가에서는 단기적으로는 글로비스, 장기적으로는 모비스 존속 부문이 주목받을 것으로 본다. 모듈과 AS 등 알짜 사업부를 글로비스에 넘기는 것치고는 분할 부문 기업가치를 다소 낮게 평가받았다는 것이 모비스 주주들 불만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모비스뿐 아니라 모비스의 알짜 사업부를 인수할 글로비스 지분을 10.59%나 갖고 있다. 글로비스가 이득을 본다 해도 국민연금이 나쁠 게 없다. 공정거래위원회 등 정부가 대체로 우호적인 분위기라는 점도 고려 요인이다.

이런 가운데 국내 민간 의결권 자문사인 서스틴베스트가 지난 5월 9일 현대모비스의 분할합병 안건과 관련해 주주들에게 반대 의견 제시를 권고한 것도 부담스럽다. 한 자산운용사 사장은 “국민연금이 현대차 지배구조 개선안을 지지할 가능성을 미리 최대한 견제하겠다는 것 같다. 한국 정부가 엘리엇을 부당하게 탄압한다고 계속 소란을 피워 이목을 끌려 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현대차 지배구조안 성사될 듯

▷장기 투자자라면 모비스 선택을

실제 주총에서 현대차 안이 무산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엘리엇은 ‘현대모비스 주주에게 불리한 합병안’이라고 공세를 펴지만 현대모비스가 미래차 기술 기업으로 탈바꿈한다는 내용의 청사진을 밝히면서 투자자들의 불안감은 진정 국면이다. 실제 현대모비스의 1분기 영업이익은 4498억원으로 전년 대비 32.7% 줄었지만 장기 성장성에 대한 기대감으로 최근 주가는 큰 변동 없이 24만원 선에서 등락 중이다.

현대모비스 주식매수청구권 가격이 23만3000원으로 현 주가(5월 9일 종가 기준, 23만5000원)보다 낮아 합병 반대 시 실익이 적다는 점도 합병 성공 가능성이 높은 이유 중 하나다. 주총이 임박했을 때 모비스 주가가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가격보다 낮다면 손실분을 보전받으려는 심리가 확산되면서 청구권을 행사하려는 소액주주들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지만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인다.

송선재 하나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지배구조 개편안이 임시주주총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제 아래 단기 투자자는 현대글로비스를, 장기 투자자는 현대글로비스와 현대모비스 주식을 매수할 것을 권한다. 개편안이 부결돼 주가가 단기적으로 떨어지더라도 중장기적으로 미래 부품 사업을 도맡을 현대모비스 주식을 매수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진단했다.

적폐 청산 자가당착이 엘리엇 초대한 꼴

1%대 지분에 휘청이는 지배구조도 문제

엘리엇의 도발에 빌미가 된 것은 한국 정부의 오락가락 정책이다.

엘리엇은 2015년에도 합병에 반대하며 법원에 삼성물산 주주총회 결의 금지 가처분신청을 냈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이후 투자위원회를 열고 12명 중 찬성 8명으로 합병에 찬성했다. 그러나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2017년 초 국정조사특별위원회는 조사 결과 보고서에서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함으로써 국민연금에 막대한 손해를 초래했다는 평가도 있다’고 적시했다.

결과적으로는 법원도 엘리엇을 도와준 꼴이 됐다. 법원은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국민연금에 대한 지도·감독권 남용(직권남용죄) 혐의로 1심과 2심에서 나란히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에게는 국민연금에 약 1387억원의 손해를 초래(업무상 배임죄)했다며 마찬가지로 1심과 2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내렸다.

재계의 후진적인 행태가 문제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총수 일가가 1% 안팎 지분으로 시가총액 수백조원에 달하는 대기업집단을 거느리는 취약한 지분구조는 제대로 손대지 않으면서 외국계 헤지펀드만 등장하면 ‘투기자본’ ‘위기론’을 운운해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결국 엘리엇이 정부에 소송까지 걸겠다고 나선 것은 일관성 없는 정책을 남발하는 근시안적 정권과 후진적 지배구조를 고집하는 대기업, 금융시장 선진화를 방치한 정부부처의 합작품이라는 지적이다.

[배준희 기자 bjh0413@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58호 (2018.05.16~05.2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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