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1948년 대한민국 출범] [1] 5·10 총선, 민주주의 첫발
- 한반도 최초의 자유민주선거
여성 선거권 스위스보다 앞서… 선거 전일·당일엔 술 판매 중지
- 北은 '흑백 투표함' 공개 선거
유엔위원단 入北 거부한 채 강행, 인민공화국 수립 일방적 선포
- 국제사회 승인 결정적 명분
유엔 "한민족 다수의 민의… 대한민국이 유일한 합법 정부"
김명섭 연세대 교수·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 |
'유권자의 날'이었던 지난 10일은 70년 전 대한민국의 제헌(制憲) 국회의원들이 선출된 날이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이 감독한 총선의 선거일은 원래 5월 9일로 정해졌으나 일식(日蝕) 예보와 일요일 선거 반대 여론으로 하루가 늦춰졌다.
38선 이북에서 '최초의 민주 선거'라고 주장한 1946년 11월 3일의 선거는 일요일에 강행됐다. 이 선거는 소련군 사령부와 기독교계를 가른 큰 분기점이었고, 이북 기독교계가 주도한 주일 선거 불참 운동은 '최초의 단독선거'에 대한 불참 운동이 되었다.
1946년 11월 3일 북한 지역의 선거는 흑백 투표함을 사용한 사실상의 공개투표이자, 강제투표였다. 그것은 러시아에서 1917년 케렌스키 사회민주정권을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았던 공산주의자들이 고안해낸 인민민주주의에 근거했다. 여기서 민주주의란 '다수의 인민이 충분히 계급의식이 고양되기 전이라도 유일 선도 정당의 독재적 방식으로 인민의 잠재적 이익을 실현하는 것'을 의미했다. 451만 6120명의 유권자가 등록했고 그중 99.68%가 투표에 참가해 후보자에 대한 찬성률 97%를 기록했다. 이 선거에 따라 1947년 2월 '임시' 자(字)를 뗀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수립됐다.
이러한 소련식 민주주의는 해방군을 자처한 소련군에 의해 뒷받침됐다. 스탈린은 "모든 세력은 자국의 군사력이 미칠 수 있는 한 어디나 자신의 체제를 이식하려고 한다"고 했다. 스탈린은 소련군의 만행에 대해서도 "그런 지옥(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나와서 여자에게 조금 몹쓸 짓을 했기로서니 뭐가 그리 대수란 말이냐? 우리는 감옥을 열어서 모조리 군대로 보냈다"라고 옹호했다.
1946년 11월 3일 북한에서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처음 실시된 선거 모습. 흑백 투표함을 사용한 공개·강제투표였다. 북한 국기가 제정되기 전이어서 태극기가 걸려 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결국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1947년 가을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을 통해 해결할 것을 제안했다. 11월 14일 유엔총회는 미군·소련군 관할 구역에서 유엔 감독하에 각각 선거를 치러서 통합 정부를 구성하자는 미국의 결의안을 다수결로 채택했다. 1948년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했다. 하지만 소련이 유엔위원단의 입북(入北)을 거부하면서 38선 이남에서만 선거가 실시될 수 있었다.
1948년 4월 중순까지 38선 이남의 유권자 877만여명 중 약 805만명인 91.8%가 등록을 마쳤다. 등록 유권자의 90% 이상이 5월 10일 보통·평등·비밀·직접 원칙에 입각한 자유민주선거에 참여했다. 인류 문명이 오랜 기간 발전시켜 온 자유민주선거가 38선 이남에서 실현된 것이다. 여성의 선거권 행사는 스위스보다도 앞섰다. 선거 전일과 당일에는 주류(酒類) 판매가 중지될 정도로 분위기가 엄숙했다. 그러나 선거 당일 수십 명이 살해되고, 수백 개의 국가기관이 피습당하는 등 방해 공작도 극심했다. 제주도 북제주군에서는 4·3 사건이 계속되어 선거가 무산됐다. 하지만 남제주군에서는 의원이 선출돼 198명 제헌국회의 일원이 되었다. 다음 해 5월 10일 북제주군에서도 선거를 통해 2명의 의원이 추가되었다.
38선 이북을 장악하고 있던 북조선로동당과 38선 이남의 남조선로동당은 5·10 총선에 반대하는 한편 독자적인 선거를 추진했다. 김달삼이 주도한 제주 4·3 사건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밀항해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던 김시종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5·10 총선에 대한) 투표 거부의 증거로서 마을 사람을 대거 입산시켰다. 거기에는 가슴 아프게도 강권적 설득과 위협이 따랐다." 입산당한 주민들은 지하선거에 동원됐다. 김달삼은 수거한 표를 싣고 38선 이북의 해주로 가서 박헌영과 합류했다.
1948년 1월 8일 한반도의 정부 수립을 관리하기 위해 서울에 도착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환영하는 아치가 김포공항 입구에 세워졌다. 인도·호주·프랑스·필리핀 등 8개국 대표로 구성된 위원단은 소련이 38선 이북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자 5월 남한에서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UN photo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1948년 8월 25일 38선 이북에서 흑백 투표함을 사용한 공개적 찬반 투표를 통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212명이 확정됐다. 1946년에 이어 다시 인민민주선거가 실시된 것이다. 김달삼을 포함해 이남 지역 대의원 360명도 추려졌다. 평양 정권은 38선 이북의 유권자 99.99%가 투표했고, 이남에서도 비밀리에 77.5%가 참가했다고 선전했다. 이를 근거로 서울을 수도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됐다.
1948년 12월 12일 프랑스 파리의 샤요궁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총회는 장면이 이끄는 대한민국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에서 주민의 '자유의지(free will)'가 표현된 유일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유엔이 인정할 수 없는 선거를 치렀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는 참석할 수 없었다. 1919년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지 못한 결정적 이유는 주민들의 의사가 선거를 통해 확인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광복 후 많은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자유민주선거인 5·10 총선을 통해 한반도 주민 다수의 자유의지가 확인됨으로써 국제사회가 대한민국의 독립을 인정한 것이다.
[김명섭 연세대 교수·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