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무크와 이스탄불
이스탄불 아야 소피아 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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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일 동안 사랑을 나눈 여자를 평생 잊지 못해 그녀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30년 넘게 모아 박물관을 세운 남자가 있다. 그녀가 잃어버린 나비 귀고리 한 짝이 첫 번째 전시품인 ‘순수박물관’은 이스탄불에 실재하는 공간이자 터키 대표 작가인 오르한 파무크(66·사진)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이스탄불의 부유한 토목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나 화가가 되고 싶었던 ‘엄친아’는 건축학과를 중퇴한다. 23세에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서재에 틀어박혀 ‘바늘로 우물을 파는’ 심정으로 치열하게 작업해 서른 살에 첫 소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1982년)을 출간한다. ‘소설은 제2의 삶’이라 믿는 그는 이스탄불의 암울한 영혼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순수박물관’(2008년)과 ‘내 마음의 낯섦’(2013년)은 주변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생생하게 기록한 인류학적 보고서 수준이다. 2002년 작고한 아버지에게 헌정한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2003년)은 지도가 첨부돼 여행 안내서로도 손색이 없다. 가족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어머니, 형과 서먹해졌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동서양 문명의 충돌을 다룬 ‘하얀 성’(1985년)은 1980년 세상을 떠난 여동생에게 헌정했다.
순수박물관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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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첫발을 디딘 뉴욕은 문화적 정체성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슬람 전통에 기반한 세밀화와 서양화풍의 대립을 밀도 있게 쓴 역사소설 ‘내 이름은 빨강’(1998년)은 한국, 중국에서 특히 주목받았다. 이슬람 신비주의 고전문학과 서구 추리소설 기법을 접목한 ‘검은 책’(1990년)은 역사학자인 아내 아일린에게 헌정했다. 여주인공 ‘뤼야’(터키어로 ‘꿈’을 의미)와 마흔에 얻은 외동딸의 이름과 같다. 딸을 유치원에 데려다주느라 밤에 집필하는 습관마저 바꾼 그는 ‘딸 바보’로 유명하다.
격동의 터키 현대사를 배경으로 사랑과 혁명을 시처럼 써내려간 ‘눈’(2001년)은 그의 작품 중 유일하게 이스탄불이 아닌 북동부 국경도시 카르스가 배경이다. 미국에서 큰 호응을 얻은 이 작품은 실연의 아픔을 잊고자 낯선 곳으로 취재 여행을 떠나는 그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 2001년 그는 19년간의 결혼생활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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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터키 정부의 아르메니아인 및 쿠르드족 학살을 언급한 그는 ‘국가모독죄’로 기소된다. 그를 구원한 것은 2006년 수상한 노벨 문학상이었다. ‘큰 상을 받은 후 더 좋은 작품을 내놓는 희귀한 작가’라는 평을 받는 그는 “폐허와 비애, 그리고 한때 소유했던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이스탄불을 더 사랑한다”고 말한다.
김이재 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
그에게 사랑은 교통사고처럼 다가오는 것 같다. 이혼 후, 최연소(35세)로 맨부커상(2006년)을 받은 인도 출신 작가 키란 데사이와 사랑에 빠진 것. 두 사람은 인도에서 자동차로 라자스탄, 고아를 횡단하고 베네치아, 그리스, 뉴욕, 이스탄불을 여행했다. ‘순수박물관’ ‘소설과 소설가’(2010년)를 데사이에게 헌정한 파무크는 다시 새로운 사랑에 빠졌다. 터키 출신 미국인 팝 아티스트 카롤린과 짧은 만남 후 요즘은 의료산업 마케팅 전문가인 터키 여성 아슬르와 열애 중이다. 이스탄불 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데이트를 즐기는 두 사람의 모습이 최근 포착됐으니 다음 작품은 달달한 연애 소설이 되지 않을까?
김이재 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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