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재 도쿄 특파원 |
이 글을 쓰는 지금, 눈앞에는 찻잔 한 쌍이 놓여 있다. 손잡이가 달린 유백색 찻잔과 넓은 받침대. 기품이 느껴지는 실금은 도공이 불(火)과 사투를 벌인 흔적이다. 사실 이 잔으로 차를 마신 건 손에 꼽을 정도다. 꺼내 놓고 보기만 한 적이 더 많았다. 그때마다 한일 간 오랜 애증의 역사를 생각했다.
찻잔 밑에는 심수관(沈壽官)의 낙관이 있다. 심수관은 16세기 말 정유재란 때 포로로 끌려가 가고시마(鹿兒島)에 정착한 도공 심당길의 후손. 400년 넘게 이어온 도예가 집안은 12대 이후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습명(襲名·선대의 이름을 계승)한다. 기자가 몇 년 전 15대 심수관을 만났을 때 그는 “나에게 일본이 아버지라면 한국은 어머니다. 한일관계가 나쁘면 부부싸움 때 아이의 기분이 된다”고 말했다.
찻잔을 선물한 분은 특파원 부임 전 연수하던 대학에서 기자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미사키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기자가 자전거로 일본을 종단했다는 말을 듣고 자극을 받아, 평소 관심이 있던 한국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장 기자를 보며 사람과 문화를 직접 접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며 여러 번 한국을 여행했고, 한국어도 공부했다.
기자에게 선생님은 일본 문화의 길잡이였다. 미술관과 박물관을 자주 다녔고, 관람 후엔 노포(老鋪·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점포)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다도도 선생님의 권유로 반년 이상 같이 배웠다. 육아휴직을 마친 아내가 먼저 한국에 돌아갈 때 선생님은 심수관의 찻잔을 건넸다. ‘한일 우정의 표시로 이보다 어울리는 건 없을 것’이란 간곡한 설명과 함께.
총 4년(연수 1년, 특파원 3년)간의 일본 생활, 울컥할 때도 많았다. 한국을 무시하는 우익 정치인의 망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일방주의 외교, 우경화되는 일본 사회…. 무력감도 느꼈다. 한일 간 구조적 갈등이 고착화되는 상황에서 일본 주재 한국 특파원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게 느껴졌다.
그러다 가끔 찻잔을 들여다보면 마음 한구석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포로로 끌려와 차별받으면서도 조선의 기술에 일본의 감각을 덧붙여 세계적 작품을 만들어 낸 도공들. 선생님은 “도공들은 자신의 작품이 열어갈 미래를 믿었을 것”이라며 “한일의 미래를 믿고 좋은 기사를 많이 써 달라”고 했다.
돌아보면 할 수 있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일본인들과 우정을 가꾸고 한일 우호의 씨앗을 뿌리는 것. 찻잔을 볼 때마다 기자가 뿌린 작은 씨앗이 언젠가 아름답게 꽃피울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곤 했다.
임기를 마치는 기자에게 선생님은 조선 맹호도 족자를 건 다실에서 녹차를 대접해 주었다. 다도 선생님과 상의해가며 다구(茶具), 의상, 소품 등을 3개월 동안 준비했다는 얘길 나중에 들었다. 차 한잔의 힘을 실감하며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기자는 답례로 하회탈과 놋그릇을 준비했다. 한국의 흥겨움과 미소, 그리고 함께 보낸 즐거운 시간을 기억해 달라는 의미였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가끔 찻잔을 들여다보게 될 것 같다. 일본에서 쌓은 우정을 떠올리고,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는 걸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잊지 않기 위해서다. 특파원 임기를 마무리하는 지금 지면을 통해 다시 작별 인사를 전하고 싶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미사키 선생님. 앞으로도 한일 간의 아름다운 인연을 이어 나갑시다.
장원재 도쿄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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