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성형 공화국의 그림자]
저수가-전문의 부족에 미용 진료만
부모들 “피부 발진도 대학병원 찾아”
4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성형외과와 피부과 간판이 즐비한 모습.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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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건물에 많게는 피부과가 7, 8개 있는데 정작 아이 피부 발진이 생기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서울 강남구에서 아들(8)을 키우는 이모 씨(40)는 “주변에 물었더니 피부 질환을 다루는 곳이 많지 않아 대학병원으로 가는 게 낫다고 하더라”며 한숨을 쉬었다. 간판에는 피부과라고 나와 있어도 막상 가 보면 미용 진료만 하고 피부질환은 다루지 않는 곳이 많다는 것이다.
‘미용 의료의 성지’로 불리는 서울 강남구의 경우 피부과 진료 의원 5곳 중 3곳은 소아 두드러기 같은 피부 질환 진료를 안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아일보가 지난달 28∼30일 서울 강남구에서 피부과 진료를 하는 의원 445곳에 ‘만 3세 자녀의 두드러기 진료가 가능한지’ 문의한 결과 256곳(57.5%)이 진료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두드러기는 가장 기본적인 피부 질환으로 이를 진료하지 않는다는 건 피부 질환을 안 본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진료를 거부한 강남구 피부과 의원들은 “미용 진료만 본다”, “보험 진료는 보지 않는다” 등의 설명을 했다. 일부 의원들은 “피부과 전문의가 있는 곳을 찾아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강남 피부과 넘치는데… “보톡스는 되지만 아토피는 안 봐요”
〈상〉 피부과 찾아 헤매는 부모들
비전문의 피부과 82% “비급여만”… 법적 ‘진료 거부 행위’ 해당 안돼
엄마들 ‘아이 질환보는 피부과’ 공유… 구개열 등 재건 성형외과도 21%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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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 당일 진료는 어려운데 마침 딱 한 자리 남았네요.”
지난달 29일 동아일보 취재진이 서울 강남구의 한 피부과 진료 의원에 전화해 “만 3세 아이의 두드러기 진료를 보고 싶다”고 하자 상담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가정의학과 전문의와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진료를 보는 이곳은 강남 지역 맘카페에서 ‘아토피 진료 명소’로 유명하다. 피부과는 많은데 정작 피부 질환을 다루는 곳이 많지 않으니 강남구에서 어린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은 온라인 등으로 ‘급할 때 갈 수 있는 피부과 진료 의원’ 등의 명단을 공유하기도 한다.
● “보톡스, 필러 등 비급여 진료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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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과 진료를 보는 동네병원은 두 가지로 나뉜다. 피부과 전문의가 있는 곳과 일반의 또는 다른 전공 전문의가 피부과 진료를 하는 곳이다. 전자는 간판에 ‘피부과 의원’이라고 쓸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 그렇게 할 수 없고 병원 이름 옆에 ‘진료과목 피부과’라고 써야 한다.
동아일보 조사 결과 강남구에서 피부과 진료를 하는 의원 중 피부과 전문의가 있는 곳은 3분의 1가량에 불과했고 나머지 3분의 2가량은 피부과 전문의가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피부과 전문의가 없는 곳 중 절대 다수(81.5%)는 “피부 질환은 진료하지 않는다”고 했다.
피부 질환을 진료하지 않는 피부과 진료 의원들은 “보톡스, 필러 등 주로 주사나 레이저 등을 이용한 시술만 한다”고 했다. 이들은 유명 연예인이 광고하는 레이저 리프팅 기기 브랜드 입간판을 입구부터 늘어 놓기도 했다. 아예 “건강보험 대상이 아닌 비급여 진료만 한다”는 곳도 있었다.
진료과목으로 피부과를 내걸고 피부 질환을 치료하지 않아도 법적으로 진료 거부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피부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전문 장비나 약품이 없다는 건 법적으로 진료를 거절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기 때문에 진료 거부로 보긴 어렵다”고 했다.
피부과는 넘쳐나는데 피부 질환을 다루는 곳을 찾기 어렵다 보니 강남지역 맘카페 등에는 자녀 피부 질환 진료를 받기 위한 ‘꿀팁’도 공유되고 있다. ‘간판에 피부과 의원이라고 나와 있는 곳을 찾아야 발진이나 가려움증 상담을 받을 수 있다’, ‘피부과 전문의가 아니더라도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근무하는 곳에선 진료가 가능한 경우가 많다’ 등의 내용이다.
실제로 동아일보 조사에서 피부과 전문의가 없음에도 피부 질환 환자를 받겠다고 한 곳 대부분은 소아청소년과나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있는 경우였다. 한 수도권 대학병원 교수는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중 일부는 저출산으로 미래가 불투명하고 몸이 힘들다며 피부과 진료를 택한다”고 설명했다. 또 올 2월 병원을 떠난 전공의(인턴, 레지던트) 중에서도 일반의 자격으로 강남 피부과에 진출한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 성형외과도 ‘풍요 속 빈곤’
피부과와 함께 미용의료의 핵심으로 꼽히는 성형외과 역시 강남에 많다. 서울 시내 전체 성형외과 전문의 의원 652곳 중 451곳(69.1%)이 강남구에 몰려 있다. 일반의나 다른 전공 전문의가 성형외과 진료를 하는 곳까지 합치면 숫자는 더 늘어난다. 강남구보건소에 따르면 올해 8월 기준으로 강남구 의료기관 2929곳 중 성형외과 진료를 하는 곳은 841곳으로 30%에 육박했다.
하지만 피부과와 마찬가지로 성형외과에서도 ‘풍요 속 빈곤’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성형외과 진료를 하는 곳 대부분이 구개열 수술처럼 기형적이거나 손상된 신체를 원형으로 복원하는 ‘재건 성형’은 안 하는 것이다. 올해 8월 강남구보건소에서 성형외과를 진료하는 의원 200곳을 조사한 결과 “재건 수술이 가능하다”고 답한 곳은 42곳(21%)에 불과했다. 5곳 중 4곳에선 사고 등으로 급박한 상황에서 재건 수술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한 강남구 주민은 “중학교 2학년 아들이 최근 유리 파편에 손이 찢어졌는데 집 근처 성형외과에서 모두 봉합이 안 된다고 해 결국 대학병원으로 갔다”고 했다.
강남 피부과와 성형외과에서 아픈 환자를 진료하지 않는 것은 수가(건강보험으로 지급하는 진료비)가 낮고 비급여 진료가 더 돈이 되기 때문이다. 미용 목적의 피부 시술이나 성형수술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보니 피부과·성형외과 전문의 외에도 일반의와 다른 전공 전문의가 몰리면서 정작 아픈 환자가 갈 곳은 없어지는 것이다.
배태희 중앙대 광명병원 성형외과 교수는 “성형외과 전문의 중에도 수가가 낮고 법적 리스크가 높다며 개원가에서 미용성형을 주로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했다.
정부는 올 들어 발표한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나 의료개혁 실행 방안 등에서 “미용의료 쏠림 현상을 막겠다”며 미용 시술 중 일부를 간호사 등에게 개방하겠다는 대책을 내놨지만 의사의 반발 등으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조유라 기자 jyr0101@donga.com
박경민 기자 mean@donga.com
여근호 기자 yeoro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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