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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세계를 보는 창 Now] 동남아서 우버 삼킨 그랩… '독점 괴물'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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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합병에 속수무책]

우버 소속 200여만명이 그랩으로… 업체 간 경쟁 사라지며 요금 인상

지난달 초 동남아시아에서는 세계 최단 기간, 최대 규모의 이직(移職)이 벌어졌다. 글로벌 차량 호출 서비스업체인 미국 기업 우버가 같은 업종의 싱가포르 기업인 그랩에 동남아 사업부문을 넘기기로 하면서 동남아 우버 기사 수백만명이 갑자기 소속을 옮기게 된 것이다. 우버는 동남아 지역 기사 수를 밝히지 않았으나 기존 그랩 기사 240만명에 버금가는 수가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에게는 그랩 지사를 방문해 그랩 기사로 신규 등록하고 전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간으로 우버의 사업 매각 발표 다음 날인 4월 27일부터 지난달 11일까지 불과 15일이 주어졌다. 우버 기사들이 이직을 위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동남아 각 도시의 그랩 지사는 연일 북새통을 이뤘다.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그랩으로 일자리를 옮기게 된 우버 기사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승객이 낸 요금에서 차량호출업체에 떼이는 수수료 비율이 운행기록과 평점에 따라 달라지는데, 우버 기사들이 그랩으로 옮기면서 그동안 우버에서 쌓은 운행 기록과 평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랩의 수수료율은 대체로 우버보다 높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우버 기사로 일해온 도미 가리오씨는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우버는 승객을 70번 태울 때마다 7000페소(약 14만원)를 줬는데 그랩은 55번 운행에 3000페소(약 6만원)밖에 주지 않는다"며 "하지만 우버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그랩 지사는 지난달 6일까지 전직 우버 기사의 75% 이상이 그랩으로 옮겨왔다고 밝혔다.

◇그랩·우버, 독점적 이익 위해 전략적으로 합병

그랩의 우버 동남아 사업부 인수·합병(M&A)이 인구 6억4000만명의 거대 시장 동남아를 뒤흔들고 있다. 하루아침에 동남아 주요 국가의 택시 시장을 장악한 독점 기업이 출현했고, 200만명 이상이 직장을 옮겼다. 기사와 승객 수억명이 인센티브와 할인 혜택 축소, 택시비 상승 가능성에 직면했다. 독점의 부작용을 막아야 할 각국 경쟁 당국(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 같은 정부기구)은 두 거대 기업의 결정에 별다르게 손도 못 쓰고 있다.

우버와 그랩은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등 동남아 8국의 180여 도시에서 자동차·오토바이 택시 시장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 왔다. 우버와 그랩은 상대보다 많은 기사를 확보하고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기사들에게는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수수료를 적게 받았고, 승객들에겐 수시로 할인 행사를 했다. 이 과정에서 천문학적인 손실을 낸 우버가 먼저 손을 들고 동남아 시장 철수를 결정했다. 우버는 대신 그랩 지분 27.5%, 16억5000만달러(약 1조7600억원)어치를 갖기로 했다. 우버와 그랩 입장에서는 출혈 경쟁을 멈추고 동남아 시장에서 나오는 이윤을 나눠 가질 수 있는 좋은 거래였다.

이 거래에는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이 이끄는 비전펀드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비전펀드는 우버와 그랩을 비롯한 세계 각 지역의 차량 호출 서비스 기업에 동시 투자하고 있는데, 지역별로 사업을 한 기업에 몰아주면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IT(정보기술) 전문 매체 테크크런치는 "동남아에서 택시 앱 매출은 2025년까지 지금의 4배 이상인 200억달러(약 21조4000억원)로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며 "그랩과 우버 모두에 득이 되는 거래"라고 지적했다.

◇독점 기업 등장으로 기사·승객, 가격 인상, 서비스 축소 우려에 울상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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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남아 각국의 기사들과 승객들은 갑자기 거대한 독점 기업과 맞닥뜨리게 됐다. 토종 기업 '고젝'이 강성한 인도네시아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에서 차량 호출 서비스 업체는 사실상 그랩과 우버 둘뿐이었기 때문이다. 이 둘이 합병해 경쟁이 사라지면 수수료율과 요금은 오르고 할인 행사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 호찌민시에 사는 응우옌반탕씨는 현지 인터뷰에서 "그랩과 우버를 모두 이용하곤 했는데, 이제 그랩이 무슨 조건을 제시하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됐다"고 말했다. 태국 일간 방콕포스트에 따르면 태국개발연구원은 "이번 합병으로 가격이 '승객이 감당할 수 있는 최고 수준'까지 오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싱가포르 일간 스트레이츠타임스는 우버가 싱가포르 내 영업을 중단하자마자 그랩이 승객에 대한 할인 혜택과 기사에게 제공해온 인센티브를 축소했다고 보도했다.

몇 년 전이라면 대안이 될 수도 있었을 기존 택시업계는 우버와 그랩이 저가 경쟁을 벌이는 사이 초토화됐다. 베트남 최대 택시업체인 비나선은 지난해 매출액과 순이익이 전년 대비 10%, 34% 감소했고, 지난해 상반기에만 기사 8000여명이 이탈했다. 다른 대형 택시업체인 마이린도 지난해 기사 6000여명이 이탈해 그랩·우버 등으로 옮겨갔다. 싱가포르 최대 택시기업인 컴포트델그로는 지난해 12월 우버의 동남아 자회사인 라이온시티홀딩스의 지분 51%를 사들였다. 자사 택시가 우버 앱으로 호출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체 택시 호출 애플리케이션(앱)으로 그랩·우버에 맞서 왔으나 대세가 기울자 손을 든 것이다.

◇독점 기업에 무기력한 동남아

독점 우려가 확산되자 싱가포르와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의 경쟁 당국은 그랩과 우버의 통합이 경쟁법에 저촉되는지 조사하겠다고 나섰다. 통상적으로 독점이나 과점으로 시장이 바뀔 수 있는 기업 간 M&A는 각국 경쟁 당국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우버가 지난달 8일 동남아 대부분 지역에서 서비스를 중단해버리면서 각국의 승인 심사가 무의미해졌다. 그랩의 독점은 기정사실이 됐고, 우버는 최악의 경우에도 지난해 해당 국가에서 올린 매출액의 일부를 벌금으로 내면 그만이었다. 필리핀 경쟁위원회는 지난달 7일 "그랩이 우버를 인수하면 필리핀 차량 호출 시장의 93.22%를 차지하게 된다"며 우버에 합병 심사가 끝날 때까지 기존 영업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우버는 필리핀에서도 8일을 더 영업했을 뿐 지난달 16일 일방적으로 서비스를 중단해버렸다. 우버는 이달 7일 싱가포르 영업 종료를 끝으로 동남아 사업에서 손을 뗐다.

싱가포르를 제외한 동남아 대부분 국가에서는 경쟁법이 정비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각 경쟁 당국은 대규모 M&A 거래를 다뤄본 경험도 거의 없다. 그랩과 동남아 우버의 '합체'에 각국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동남아에서 경쟁 당국의 다수는 생긴 지 겨우 몇 년 됐을 뿐이고 참고할 선례도 거의 없다"며 "그랩과 우버의 거래는 이 경쟁 당국에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싱가포르=김경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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