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19 (화)

남북정상회담 D-2...판문점은 왜 판문점으로 불릴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헤럴드경제

[사진=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헤럴드경제=이명수 기자] 오는 27일 역사적인 남북정상 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린다. 과거 두차례나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지만 이번에는 북측 정상이 최초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에서 회담을 개최함으로써 남북관계의 큰 획을 그을 전망이다.

이에따라 한반도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판문점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고 있다. 특히 너무 익숙해진 명칭인 판문점이 왜 판문점으로 불리는지 궁금증도 커지고 있다.

판문점은 다 알다시피 6·25전쟁 때 1951년 10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유엔군과 공산군 간에 휴전회담이 열렸던 곳이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지역이 개성부(開城府) 판문평(板門平)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이 부근에 널문다리〔板門橋〕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설과 이 마을에 널판지로 만든 대문〔널문〕이 많았기 때문에 ‘널문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널판지 다리를 판문교(板門橋)라고 불렀는데 ‘개성군면지’ 에 의하면 판문교는 개성쪽에서 널문리를 지난 지점에 위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6·25전쟁 직전 널문리는 경기도 서북쪽의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와 개풍군 봉동면 침송리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농촌 마을이었다.

그러나 휴전회담이 이곳에서 진행되면서부터 갑자기 국제적인 이목을 끌게 되었다. 6·25전쟁 휴전협상이 처음부터 이곳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당초 휴전회담 예비회담은 1951년 7월 8일 개성 북쪽에 위치한 내봉장에서 개최되었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회담장소 주변에서 북한군이 의도적으로 무력시위를 벌이는 등 회담장소의 중립성이 문제가 되자 국제연합국측은 1951년 9월 6일 회담장소 이전을 공산측에 제의하였다.

북한측이 1951년 10월 7일 새로운 회담장소로 널문리 주막마을을 제의하자 국제연합측이 그 다음날 이에 동의함으로써 회담장소가 개성에서 널문리 마을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6·25전쟁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와 개풍군 봉동면 발송리 사이에 걸쳐 있다. 최초의 판문점 회담장소는 도로변에 초가집 4채가 있던 널문〔板門〕이라는 고장이었으며, 이곳에서 천막을 치고 휴전회담을 하였다.

판문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이유는 휴전협정에 참석하는 중공군 대표들이 이곳을 쉽게 찾아보게 하기 위해 당시 회담장소 부근에 있던 주막을 겸한 가게(店)를 한자로 적어 "판문점(板門店)"으로 표기했기 때문인것으로 알려졌다.



husn7@heraldcorp.com


- Copyrights ⓒ 헤럴드경제 & heraldbiz.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