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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대물림 된 군림 본능, 재벌가 갑질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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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이나 능력 검증ㆍ조직경험 없이

초고속 승진한 재벌가 2, 3세들

폭언 등 물의… 기업 이미지 훼손

‘세습 신분’ 착각, 기업을 사유물로 생각

회삿돈 편취ㆍ일감몰아주기도 횡행
한국일보

한진그룹 총수 일가 관세포탈 혐의를 조사 중인 관세청이 대한항공 본사 전산센터와 김포공항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한 23일 오후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전산센터에서 직원들이 건물을 드나들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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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한진그룹 일가의 행태에 이토록 분노하는가.

수많은 제보로 드러난 그들의 행동이 건전한 시민의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긴 하지만,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현상 때문만은 아니다. 한진 일가가 지금까지 보여준 여러 행위는 우리 국민이 오랫동안 눈살을 찌푸려 온 ‘재벌의 어두운 민낯’을 축약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기업을 사유물처럼 여기며, 총수 일가란 지위를 세습되는 신분으로 착각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런 시대착오적 인식 때문에 총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20, 30대에 요직을 차지하고 경영을 승계하는 관행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단지 대한항공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24일 재계에 따르면, 최근 수년간 한진그룹 조현아, 조현민 자매가 번갈아 일으킨 물의는 여러 재벌 2~4세가 주기적으로 일으키는 ‘갑질’ 전횡의 축소판과 같다. 재벌가 자녀들의 각종 폭언ㆍ폭행, 음주난동의 원인을 바로 초고속 승진에서 찾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조현아 전 칼호텔네트워크 사장은 입사 7년, 조현민 전 전무는 4년 만에 임원으로 승진했다. 지난해 CEO스코어 조사에 따르면, 국내 100대 그룹 사주 일가는 평균 29.7세에 입사해 불과 4년 만인 33.7세에 임원을 달고 있다. 업무능력, 인성에 대한 검증이나 조직 생활에 대한 훈련 없이 사회생활 초기부터 ‘떠받듦’을 받다가 벼락 승진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의 어떤 행동이 기업 경쟁력을 오히려 갉아 먹는지 자각할 기회를 잃고 만다.

총수 일가라면 거의 예외 없이 계열사 임원이나 경영 직함을 줄줄이 나눠 가지는 건 유독 우리 사회에서만 당연시되는 문화다. 지난 2014년 ‘땅콩 회항’ 사태로 사퇴할 당시 40세였던 조현아 씨는 전 대한항공 부사장을 비롯한 4개의 직함을 맡고 있었고, 이제 35세인 조현민 전 전무는 최근까지 7개 직책을 겸직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경영천재라도 혼자 감당하기 힘든 직책을 훈장처럼 달아주는 것을 ‘경영수업’이라 보기는 힘들다. 재계 관계자는 총수 일가가 단순히 대주주로 머무는 데 만족하지 않고 다투어 기업 임원직을 맡으려 하는 이유에 대해 “임원이 되는 순간, 전담 비서부터 시작해 온 조직이 자신을 떠받들고 회사 밖에서도 대우가 달라지기 때문에 이런 무형의 이익을 놓치기 싫은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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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기업을 사유물로 여기기에, 명백한 범법행위인 ‘사익편취’에 대해서도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조양호 회장은 지난해 평창동 자택 수리에 대한항공 회삿돈 30억원을 빼돌려 쓴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았다. 부인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이 계열사 내 어떤 직함도 갖지 않고 있음에도, 그룹 직원들에게 폭언을 일삼았다는 증언이 잇따르는 것도 총수 일가의 이런 인식을 대변한다. 다른 대기업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렵지 않다.

대한항공은 현재 관세청으로부터 관세포탈 혐의도 수사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총수 일가가 해외에서 산 각종 명품의 운반 수단으로 회사의 항공 서비스와 직원을 동원했다는 의혹 역시 회사를 사유물처럼 여기는 인식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범죄행위이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는 기내면세품 판매와 관련해 대한항공이 총수 일가에 부당 이익을 제공했는지 조사에 나섰다. 앞서 2016년에는 대한항공이 직원을 동원해 기내면세품 인터넷 광고 업무를 대부분 하게 하고, 광고 수익은 조현아ㆍ원태ㆍ현민 씨가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에 몰아준 혐의로 대한항공과 싸이버스카이, 유니컨버스에 14억3,0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 같은 일감몰아주기 관행 역시 숱한 대기업에서 반복되는 사익편취 행위다.

가족 간 재산분쟁이나,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무자격자가 최고경영자가 되는 비극도 한진그룹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2002년 조중훈 창업주 사망 이후 형제간 재산분쟁 끝에 한진그룹은 대한항공(조양호), 한진중공업(조남호), 메리츠화재(조정호) 등으로 계열분리됐다. 이후 2006년 한진해운을 경영하던 조수호 회장이 숨지자 “가정주부였기 때문에 전문성이 부족했다”고 스스로 고백한 부인 최은영 회장이 경영을 이어받았다가 얼마 안돼 세계 유수의 해운회사가 공중분해 됐다.

전문가들은 왜곡된 재벌 관행과 문화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문형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인에게는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를 종종 내 영향력이 미쳐야 한다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며 “재벌의 직접 경영 자체를 좋다 나쁘다 판단할 순 없지만, 소유한 기업을 누가 더 잘 운영할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양동훈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도 “기업의 창업정신을 이어받아 지속 가능한 경영을 펼칠 수 있는 적임자를 판별할 능력이나 절차가 전반적으로 미비한 상황”이라며 “이에 대한 진지한 사회적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김용식 기자 jawohl@hankookilbo.com

맹하경 기자 hkm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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