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귀걸이, 황룡사지, 국립경주박물관. |
1978년 5월 28일, 경주 황룡사지 발굴 현장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목탑지의 토층을 확인하려고 판 도랑에서 청동제 팔찌와 그릇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2년 전 시작한 이 발굴에서 목탑지는 핵심이 아니었다. 1964년에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도굴된 후 조사를 했기에 이번에는 기단(基壇)의 규모 정도만 밝혀볼 참이었으나 지도위원들은 전면 조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7월 4일, 경주고적발굴조사단 김동현 단장과 최병현·윤근일·신창수 학예사 등은 목탑 하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에 착수했지만 3주가 다 되도록 진도를 빼지 못했다. 7월 25일, 크레인을 이용해 약 30t 무게의 심초석을 들어 올리자 곳곳에서 유물 흔적이 드러났다. 그릇, 손칼, 가위, 도끼, 낫, 침통, 귀걸이 등 신라산 물품이 주종을 이뤘고 당에서 들여온 청동거울과 백자도 출토됐다.
창건기의 탑지(塔誌) 등 기록은 나오지 않았고, 신라에 위협이 되는 나라들의 침입을 막으려 탑의 층마다 일본, 중화, 오월 등 가상 적국을 할당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부합하는 유물도 확인되지 않았다. 발굴품에 대해 학계에서는 창건기의 사리기와 공양품으로 보거나 지신에게 제사 지내며 넣어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탑은 신라가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이루는 과정에서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으로 보인다. 불국토에 산다고 생각한 신라인들에게 거대한 탑은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장치였다. 특히 전장(戰場)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들과 그들의 가족에겐 두려움을 완화하는 성소였을 것이다. 아쉽게도 이 탑은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의 방화(放火)로 전소됐다.
그 후 780년이 지난 지금 이 탑의 복원 계획이 구체화되고 있지만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볼거리' 창출을 위해 국가 사적에 건물을 짓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이 나오고 있고, 발굴을 통해 탑의 하부구조를 겨우 살폈을 뿐 탑의 외형은 말할 것도 없고 높이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는 점을 우려한다. 문화유산은 원상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오랜 외침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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