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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0 (금)

"곗돈 탔으니 또 좋은 그림 하나 장만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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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표 KDI원장 등 13명…11년째 '好樂美' 계모임

매일경제

서울 성동구 `아뜰리에 아키` 갤러리에서 김남표 작가가 백호 그림을 설명하자 지동현 에이엠플러스자산개발 대표, 박은관 시몬느 회장, 최정표 KDI 원장, 김순응 김순응아트컴퍼니 대표(앞줄 왼쪽부터) 등 미술 계모임 `호요미` 회원들이 경청하고 있다. [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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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동구 서울숲에 어둠이 내렸지만 인근 주상복합빌딩 갤러리아포레 1층에 위치한 화랑 '아뜰리에 아키' 조명은 여전히 환했다. 전시장에는 거센 파도에서 백호가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대형 그림이 걸려 있다. 금방이라도 내 앞으로 다가올 것처럼 생생한 호랑이다.

극사실적인 묘사로 초현실적인 세계를 만드는 화가 김남표 세종대 겸임교수(48)의 파스텔화 'Sensitive Construction(세심한 건축) #19'가 노신사 10여명을 압도했다. 미술애호가 모임 '호요미(好樂美)' 회원들이다. 최정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65)이 2007년부터 이끌어온 이 모임은 곗돈으로 그림을 사고, 갤러리를 찾아다니면서 화가와 미술평론가의 강연을 듣는다. 국내외 유명 미술관을 방문해 안목을 높이기도 한다.

호요미는 논어 제6 옹야편(雍也篇) 20장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알기만 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에서 따왔다. 아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더 나아가서는 미술을 즐기는 사람이 되자는 의미다.

최 원장은 "그림 공부를 하고 젊은 작가들 물감값이라도 도와주자는 취지로 시작했는데 벌써 11년째다. 모임을 해체하려고 해도 다들 꿈쩍도 안 하다. 한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에 회원을 더 늘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2006년부터 작품 가격을 비교 분석한 국내 첫 미술품가격지수(KAPIX)를 발표해 컬렉터들에게 정확한 작품 가격 정보를 제공해왔다.

바쁜 일상에 쫓기다 매달 한 번 모이는 그림 공부는 힐링이자 삶의 활력소다. 모임 자체가 스트레스를 주지 않기 위해 배려심이 많은 성품을 가진 회원들만 엄선했다고 한다. 회원 13명 면모도 쟁쟁하다. 최 원장을 비롯해 조태훈 전 건국대 교수(75), 김낙회 전 제일기획 대표(67), 김순응 김순응아트컴퍼니 대표(65), 김신배 전 SK그룹 부회장(64), 안경태 전 삼일회계법인 회장(64), 박은관 시몬느 회장(63), 이동규 김앤장법률사무소 고문(63), 홍준형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62), 김도균 대천나염 대표(62), 임영철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61), 지동현 에이엠플러스자산개발 대표(60), 이무경 전 경향신문 기자(51) 등이 '그림 우정'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들의 미술 사랑이 넘쳐 야간 수업도 즐긴다. 이날 김남표 작가의 개인전 작품을 감상하고 그의 강연 '현대미술의 이해: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를 경청했다.

김 작가는 백호 그림 앞에서 "10여년간 손으로 파스텔을 비벼 그림을 그리다보니 지문이 사라졌다"며 "호랑이를 만난 후 무겁고 깊은 이야기를 그리고 싶어 유화로 넘어갔다. 붓 대신 면봉으로 즉흥적으로 파도를 그려나갔다. 극사실적으로 파도가 일어선 물결을 생생하게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전시장 벽에 석양 무렵 바다와 동트는 새벽 바다처럼 보이는 그림 2점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작품 세계의 변화 앞에서 호요미 회원들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지동현 대표는 "바다 시간대가 다른가. 어느 작품을 먼저 그렸냐"고 묻자 김 작가는 "일몰이나 일출을 신경 안쓰고 작업할 때 떠오르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그린다. 사실 이런 파도는 실제로 없다"고 답했다.

김 작가는 "미술의 꽃은 보는 것이다. 자기 만의 시각이 있어야 한다. 내 아내(최은경)는 미술관장(연희동 프로젝트)이고 디렉터이지만 내 그림을 싫어한다. 우리집에 내 작품 한 점도 없다. 나도 아내가 구입한 그림들이 싫다"고 말해 폭소가 터져나왔다.

이 계모임의 특징은 '3-3법칙'. 가능하면 30대 신진 작가 작품을 구입해 격려하고, 작품 가격도 300만 원대로 제한한다. 이날도 김남표 작가의 세종대 제자인 구상화가 안태기(31)·김문근 작가(28)를 초청해 대화를 나눴다.

안 작가는 "원래 내성적었는데 내 감정이 담긴 그림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한다. 기억 못하는 유년시절 등 오랫동안 쌓인 것들은 순간적으로 표출한다"며 작품관을 소개했다. 김 작가는 "어떤 의미를 그림에 담기 보다는 마음에 둔 순간을 기록하는 일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계모임 연회비는 260만원. 200만원은 그림값이며, 60만원은 식사비다. 한 그림을 두고 경합할 때는 가위바위보로 최종 낙찰자를 정한다.

정기 모임은 매달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성심성의껏 준비한다. 이날 강연을 기획한 이동규 고문은 지난 1월 김남표 작가의 호랑이 그림을 구입한 인연으로 그를 모임에 초청했다. 이 고문은 "거실에 걸어두고 런닝 머신 위에서 호랑이를 바라보면서 뛴다. 백호가 편안하게 누워있고 폭포와 학이 어우러진 풍경이 무릉도원 같다"고 말했다.

경기도 의왕시에 위치한 핸드백 제조사 시몬느 사옥 로비에 미니 갤러리를 만든 박은관 회장은 "다른 네트워크는 안 해도 이 모임 만은 꼭 나오는 우등생"이라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호요미는 최근 멤버 13명의 미술관·갤러리와의 행복한 동행 이야기를 담은 책 '우리는 곗돈으로 그림산다'(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펴냄)를 출간했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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