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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0 (금)

[매경시평] 정글 vs 동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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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여긴 정글이다.' 스타트업 천국이라는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 흔히 듣는 얘기다. 스탠퍼드, UC버클리 같은 세계적 명문 대학교의 학생들이 제2의 페이스북, 아마존을 꿈꾸며 무한 경쟁을 한다. '몇 번 실패해 봤니?'가 경력이 될 정도로 낙오자는 많다. '천사(angel)'로 불리는 민간자본도 실은 10년 후 대박이라는 1%짜리 실올 희망을 두고 경쟁한다. 무한 경쟁 속에 '시장'의 신호만을 보고 끊임없이 도전한 시행착오가 만들어낸 역사이다.

우리는 사실 어느 정부 할 것 없이 '실리콘밸리 증후군'이라 할 정도로 창업대국을 동경하며 이른바 '따라 하기'를 해왔다. 정부, 지자체, 대기업 할 것 없이 하드웨어를 그대로 들고 왔지만, 소프트웨어는 가져오지 못했다. '시장'의 경쟁압력이 만들어낸 시행착오를 금세 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맥킨지는 경쟁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는 높은 진입장벽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지금 글로벌 100대 사업모델이 만약 한국에서 사업을 할 수 있을까?'를 분석해 보니 57개사가 한국에서는 '일부 또는 원천 불가'였다고 한다. 미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지만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비교해 봐도 한참 뒤처진다.

실제로,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 기업이라는 우버(uber), 리프트(Lyft) 같은 차량공유서비스는 단순한 카풀(car pool)을 넘어 교통 분산 알고리즘 개발, 자율주행차 실험, 날아가는 택시 프로젝트 등 놀랄 만한 미래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을 못 넘어 첫발을 못 떼고 있다. 스마트폰과 센서만 있으면 당뇨, 고혈압 같은 만성질환을 관리할 수 있다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뜨는 벤처(프로테우스 디지털 등)도 한국의 '원격의료 금지'라는 의료법에 막혀 있다. 이들뿐인가. 수많은 자격증, 시험을 봐야 하는 직종들도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들도 모르게 기득권이란 벽을 쌓아왔다.

생태계 구조도 냉혹한 경쟁보다 따뜻한 지원에 방점이 찍혀 있다. 잠재력 높은 신생 스타트업이 성장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보다는 기존 기업의 연명을 도와주도록 되어 있다는 평가들이 나온다. 실제, 우리의 중소기업 정책은 금융지원과 한계기업 지원이 대부분이지만, 벤처기업 강국 독일, 미국은 R&D와 인재 개발에 정책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한다. 실패가 자산이 되는 선진국과는 달리 우리는 한 번 실패하면 재기 가능성이 거의 없다. '창업 후 10년 만에 세계 최고 기업이 됐다'는 마크 저커버그(페이스북 창업자)의 스토리는 부러운 남 얘기가 될 수밖에 없다. 중소벤처기업부의 신설로 벤처정책과 혁신성장정책의 변화를 기대해 본다.

기업들의 상명하복식 경영관행, 수직적 회의문화, 칸막이 업무행태도 문제다. 하루에 평균 11시간을 일하니 일주일에 2, 3일 야근할 수밖에 없다. '팀장은 답.정.너'(답은 정해졌다. 너는 대답만), '팀원은 멍때리기'식 회의문화도 아직 많다. 맥킨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국내 기업 77%의 조직 건강도는 글로벌 하위권이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전 세계가 '혁신'을 통해 성장을 만들어 가는 지금이다. '뒤처지지 않았나?' 그 어느 때보다 기업들의 조바심은 크다. 역대 정부들이 중요성을 인지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던 규제개혁이 이번에는 꼭 실질적인 효과를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부도 '대표 규제를 공론화해 이해관계를 풀어낼 해법을 마련하겠다'고 한다. 기업들도 기업문화 선진화를 위해 탄력근무, 낭비 없는 회의, 수평적 조직 등의 경영환경을 점차 만들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101번 고속도로 인근에는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시스코 등 당대 최고 IT기업들이 있다. 현지 기업인들의 말이다. '실리콘밸리는 규제당국이 있는 미국 동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서부이기에 성공했다' '정부에서 돈 받는 스타트업은 매력 없다' '벤처생태계도 기업문화도 울타리가 처지는 순간 발전은 없다. 불편한 정글이 편안한 동물원이 된다'.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목숨 걸고 경쟁한 호랑이와 서울대공원 우리 안에 갇혀 있는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길지 자명하다.

[이동근 현대경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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