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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금)

교실에 ‘인권’ 초대한 왕년의 ‘왕칼 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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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교육] <인권 수업> 쓴 이은진 교사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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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 안 해오면 운동장 10바퀴!” “준비물 안 가져오면 앉았다 일어섰다 100번!”

부모·자식세대를 통틀어 ‘~안 하면 벌 받기’는 교실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규칙이다. ‘벌이 없으면 아무도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는 익숙한 말은 학교 곳곳에 녹아들어, 아이들이 학교에서 해서는 안 되는 행동 목록만 수십 가지를 만들어냈다.



군기 꽉 잡던 교사, ‘인권교사’로 변신

‘벌·규칙 등 엄격할수록 말 잘 들어’

‘인권 가르치면 아이들 드세져’ 등

인권교육에 대한 흔한 오해 있어

‘억압·강제 안 하겠다’ 교사 먼저 선언

토론 통해 우리반 인권선언문 만들어

내 권리만큼 타인 권리 소중함 배워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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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벌’ 줄수록 교실평화 지켜질까

벌이 엄격할수록 말 잘 듣는 교실이 될까? 아이들은 혼나지 않으면 정말 규칙을 안 지킬까? 화내며 소리 지르는 것만이 교실을 통제하는 유일한 방법일까?

최근 <인권 수업>을 펴낸 서울발산초등학교 이은진 교사를 6일 만났다. 이 교사는 “우리는 규칙 만들기를 상벌 기준 만들기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사는 초임 시절 처음으로 ‘학급 규칙’을 만들어보며 놀랐던 순간을 회상했다. 아이들 스스로 교사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처벌 규정을 만들고 싶어 했다. “오리걸음부터 ‘몇 대 맞기’ 등 먼저 다양한 벌칙들을 제안하더군요. 벌칙을 만들지 않겠다고 하자 아이들이 오히려 반발했습니다. 강제성을 띤 처벌을 당연시해온 탓에 ‘잘못하면 해를 입어야 한다’는 사고가 굳어진 거죠.”

지금은 ‘베테랑 인권교육 교사’가 됐지만 15년 전 초임 시절만 해도 이 교사는 ‘왕칼 쌤’으로 불렸다. 군기 바짝 든, 조용하고 살벌한 교실에 들어서면서 자신을 좋은 교사라고 철석같이 믿은 시절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이 모여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다가갔는데 이 교사의 눈치를 보며 순식간에 교실 곳곳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봤다. ‘아, 이거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인권교육을 위한 교사모임 샘’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인권 관련 강의엔 빠짐없이 참석해 공부했다.

7년 전부터는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 아이들과의 첫 만남에서 ‘힘의 포기’를 선언한다. “앞으로 1년간, 우리 교실은 ‘인권친화교실’이 될 겁니다. 나는 여러분을 힘으로 통제하거나 억누르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교사로서 해야 할 일 때문에 지시를 할 때가 생길 수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분의 인권과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이때 대부분은 ‘인권? 도대체 무슨 뜻이지?’라는 표정으로 눈만 껌뻑거리거나, 더러는 교사가 어디까지 허용해줄지 ‘간을 보는’ 아이들도 있다. 교사가 힘을 포기한다는 것을 ‘제멋대로 해도 된다’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교사는 매년 이렇게 ‘힘’을 포기한다. 1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할 교실살이를 인권교육의 장으로 만들어보겠다는 다짐이자 의지이기도 하다.

학기 초 힘의 포기를 선언한 뒤 ‘우리 반 인권선언문’도 만든다. 4~5명이 한 팀이 되어 ‘내가 존중받고 싶은 것은? 친구는 어떤 권리에 관심 있을까?’ 등을 생각해 문장으로 만들어보는 시간을 갖는다. ‘제1조 우리는 누구나 외모나 능력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제6조 우리는 누구나 인격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제9조 우리는 누구나 수업을 방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등 다양한 조문이 나온다. 이 교사는 “항목들이 다소 추상적인 듯 보이지만, 이 속에 담긴 뜻은 아이들이 교사보다 더 잘 안다. 팀별 토론 과정을 통해 구체화한 약속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처벌 기준이 없을 때 느끼는 불안함이 교사와 학생을 지배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반 인권선언문을 출력해 교실 앞쪽에 붙여두면 아이들이 오며 가며 유심히 봐요. 일종의 ‘평화로운 약속’ 같은 거죠.”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아이들과 ‘권리 선물상자’ 게임도 한다. 휴식을 취할 권리, 안전하게 생활할 권리, 사생활을 보장받을 권리 등 카드를 만든 뒤 아이들은 물론 교사 자신도 그날 기분에 따라 필요한 ‘권리 카드’를 선택한다. 예를 들어 학원 수업에 치여 ‘휴식을 취할 권리’를 선택한 학생은, 카드를 선택한 이유와 더불어 자신의 ‘짜증난 감정’을 교사와 친구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해본다. 권리 카드를 들고 본인의 감정을 단어로 정확히 드러내는 과정을 경험하면 아이의 짜증도 어느덧 사라진다. 오히려 부모와 교사의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자신이 뽑은 카드에 적힌 ‘나의 권리’와 감정이 소중한 만큼 상대방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인권교육과 인성교육은 다릅니다

“학교폭력도 심각한데, 인권 잘 가르쳐서 애들 좀 착하게 만들어봐요.”

“인권교육? 그런데 말이야, 애들이 자기주장만 하고 이기적으로 변하면 어쩌려고 그래?”

이 교사가 인권교육을 하겠다고 했을 때 동료 교사에게 들었던 말이다. 아이들을 ‘착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과 ‘이기적인 사람’으로 키울 수 있다는 불안감 등은 인권교육에 대한 오개념에 해당한다. 권리만 주장하는 무책임하고 독단적인 학생을 만든다는 인식도 인권교육의 걸림돌이다.

인권교육이 교실에서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주로 외부 강사에 의해 일회성, 전달식으로 진행되는 것도 교사의 뒷감당을 힘들게 한다. 일회성 인권 강의를 통해 1~2시간에 걸쳐 ‘권리’에 대한 설명만 들은 아이들의 ‘자기주장’에 골치가 아픈 것도 사실이다. 학생들이 배운 내용은 권리뿐이고, 학교와 가정 등 생활 속에서 이를 ‘책임’과 함께 활용하는 방법을 익힌 적이 없으니 이런 오개념은 더욱 강화된다.

이 교사는 “화내고 소리 지르며 아이들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것은, 교사가 아닌 교육 비전문가들도 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교사는 교육 전문가로서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교대 시절 다양한 상담 기법 등을 배우는 것이죠. 아이들은 인권을 통해 자신을 스스로 존중하는 법, 나아가 타인도 자신만큼 존중받아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착한 아이 되는 법’이 아니라 ‘너와 나를 사람으로 대하는 법’을 깨닫게 되는 거죠.”

글·사진 김지윤 기자 kimjy1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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