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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데스크의 눈]당신은 매력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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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최은영 소비자생활부장] 얼마 전 한 변호사와 업무상 통화에서 있었던 일이다. “목소리 좋으시네요.” 서로 칭찬하다가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얘기를 하며 거둬들인 적이 있다. 성적 의도가 없었다는 건 서로 알았지만 상대가 다르게 받아들였다면 성희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성추행 또는 성폭행을 당했다는 폭로가 줄을 잇고 있다. 지난 금요일에는 가르치던 학생들을 성추행 했다는 의혹을 받아온 배우 조민기씨가 경찰 소환 조사를 사흘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다. 한 여검사의 고백으로 시작된 미투 운동이 문화계를 넘어 종교·학계, 심지어 정치권까지 일파만파 확산하고 있다. 행동은 물론이고 말 한마디가 조심스러운 때다.

최근 연이어 터져 나오는 미투 사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사회적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 첫 번째다.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내가 속한 세계의 왕” “절대권력” 등으로 가해자를 설명하고 있다. 가해자로 언급된 이들은 모두 저마다 속한 세계에서 권력자였다.

또 다른 공통점은 ‘기억의 왜곡’이다. 피해자는 “끔찍한 순간”이라는데 가해자는 “연인 사이였다”거나 “뜻이 잘못 전달됐다”, “잠시 연애 감정”이었다고 말한다. “취중 상태였다”거나 “잘못인지 몰랐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한 이도 있다. 몇몇은 아예 입을 닫았다. 극히 일부만이 “처벌 받겠다”며 잘못을 시인했다.

가해자는 모두 남성에, 피해자는 모두 여성인 점도 인상적이다. 이번 미투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지난 날을 돌이켜 본 이들도 많았다. 10년, 20여년 전의 일이 문제로 불거지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10여년 전 직장에서 모시던 한 상사는 회식 자리에서 술잔이 몇 순배 돌고 나면 ‘흑기사’(술을 대신 마셔주는 사람)를 외쳤다. 소폭(소주+맥주 폭탄주)이 담긴 컵에는 배춧잎도 몇 장 감겨 있었다. 흑기사가 나타나 술잔을 비우면 그 상사는 들고 있던 돈을 그 후배의 가슴팍에 꽂아줬다. 그 상사는 여성이다.

얼마 전 직장인들의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선 한 화장품 회사의 직원이 사내 성추행을 했다는 글이 올라와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당시 폭로 글에는 “(김씨가) 술자리에서 툭하면 (여직원을) 껴안고 나이트클럽에서 억지로 블루스를 췄다”며 “사람 많은 곳에서 (김씨는) 웃통을 벗고 주사를 부리기도 했다”고 적었다.

그 시절 노래방에서 술을 마시며 블루스를 추는 일은 다반사였던 걸로 기억한다. 내키진 않았지만 몇 번은 분위기를 맞췄고, 몇 번은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피했다. 실제 한 남성 동료는 술이 취하면 바지를 벗는 고약한 버릇도 있었다. 그들의 추태가 보기 좋았다고 할 순 없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 광경에 기분 나빠할 여성의 수도 사실 몇 안 됐다.

당시에는 시대가 그랬다. 야만적이었다. 그렇게 보면 필자도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당시 여성 상사는 후배를 희롱하려고 그렇게 과감한 행동을 했을까? 소위 ‘센 여자’만이 살아남던 시절이다. 어쩌면 ‘너희들만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다’ 대다수 남성들에게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필자도 딱 한번 술자리에서 그 선배의 행동을 따라한 적이 있다. 반성한다. 혹여라도 그 모습에 상처받은 누군가가 있다면 지면을 빌어 사과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다. 어려 보여요, 감각 좋으세요 등등….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했다. 칭찬과 아부, 아첨을 구분하지 못했다.

권력이 뇌를 망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미국과 캐나다의 정신분석학자들이 권력과 뇌 기능 간의 관계를 연구했는데, 권력자가 되면 상대방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뇌손상’을 겪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안다. 뇌손상의 정도가 치유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기 전 그 사실을 깨닫게 돼 다행이다.

과장, 차장, 팀장, 부장, 국장, 실장, 사장, 회장까지. 이 세상의 모든 장(長)들이여,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보며 되뇌자. “나는 매력적이지 않다”고. 그리고 아랫사람들이 모이는 술자리에는 가급적 끼지 말자.

회식에 동석하더라도 입은 최대한 닫자. 귀와 지갑만 열면 된다. ‘펜스룰’(Pence Rule) 운운하며 남성과 여성의 공간 자체를 구분하는 건 촌스럽다. 성이 같고, 다름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이 있고 없음의 문제다.

이번 미투 사건을 계기로 우리 국민의 인식이, 우리 사회가 완전히 바뀌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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