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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화곡동서 119 부른뒤 "강남 큰 병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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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환자 아니면서 근처 병원 두고 30㎞이상 떨어진 곳 막무가내 요구

119 센터 한 곳당 구급차 1.3대뿐… 한 대 출동하고 나면 車 없어 공백

"장거리 갔을때 환자 생길까 겁나"

급한 상황도 아닌데 구급차를 불러놓고 멀리 있는 대형 병원으로 가달라고 요구하는 이들이 있다. 이송(移送)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응급 환자가 발생해도 구급차가 곧장 투입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긴다. 구급차 이용이 무료라는 점을 악용한 '얌체 환자' 때문에 의료 공백이 발생하는 것이다.

지난 1월 19일 오전 7시 30분쯤 서울 강서구의 한 119 안전센터. "어지러움이 심한데 평소 앓던 뇌종양 때문인 것 같다. 구급차를 보내달라"는 50대 남성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 남성은 출동한 구급대원에게 "강남의 대형 S병원으로 가겠다"고 했다. 약 30㎞ 떨어진 곳이었다. 구급대원이 증상을 감안해 가까운 병원을 권했으나 이 남성은 "계속 진료받던 곳"이라며 고집했다. 구급대원들은 출근길 혼잡 도로를 약 한 시간을 달려 S병원으로 갔다.

조선일보

/사진=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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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병원에는 이 남성이 응급실에 한 번 온 것 외에 진료 기록이 없었다. 원하는 병원에 가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 안전센터에는 구급차가 1대밖에 없다. 만약 인근 지역에서 응급 환자가 발생하면 다른 안전센터에서 구급차를 불러와야 한다.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급대원은 "장거리 운행을 하면 다른 환자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고 설명해도 막무가내인 이들이 많다"고 했다.

편의를 위해 멀리 떨어진 병원으로 가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2월 서울 양천구의 안전센터는 두통을 호소하는 30대 남성의 신고를 받고 구급차를 출동시켰다. 이 남성은 10분 거리인 근처 병원으로 이송하겠다는 구급대원의 말을 거절하고 "어머니가 오기 편하도록 신촌의 병원으로 가겠다"고 했다. 당시 출동한 구급대원은 "환자는 '신촌으로 오라'고 어머니에게 전화할 정도로 멀쩡한 상태였다"며 "관내를 비운 사이 다른 응급 환자가 생길까 봐 조마조마했다"고 말했다.

구급차가 관외 지역으로 장거리 운행을 할 경우 '구급차 공백' 문제가 생긴다. 소방재난본부에 따르면 현재 전국 1029개 안전센터에서 운행 중인 구급차는 1384대다. 안전센터 한 곳당 1.34대꼴이다. 구급차가 관내를 비웠다가 또 다른 응급 환자가 발생하면 다른 지역의 구급차를 끌어다 써야 한다.

서울의 한 안전센터 관계자는 "출동이 꼬여 30분 넘게 떨어진 다른 지역으로 출동하는 경우도 있다"며 "서울은 급하면 구급 장비를 실은 소방차나 오토바이가 대신 출동하기도 하지만, 지방은 여건이 안돼 '5분 내 출동'이라는 원칙이 지켜지기 어렵다"고 말했다. 사설 구급차 업체도 있지만 119 안전센터에 들어온 신고를 사설 업체와 공유하는 시스템이 없다.

구급대원들은 환자들의 막무가내 요구를 거절하기 어렵다. 119구조·구급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구급대원은 응급 환자가 구급 활동을 방해하는 경우 환자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 타당한 이유 없이 먼 병원을 고집하는 것도 구급 활동 방해에 포함된다. 그러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환자들이 민원을 넣는 등 항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지난해 10월 경기도의 한 안전센터에서는 낙상을 당한 환자가 관외 병원을 가달라고 요구하자 환자에게 근거리 이송 원칙을 설명하고 근처 병원으로 이송했다.

그러나 이 환자의 가족은 국민신문고에 '안전센터가 시민 요구를 무시했다'며 민원을 넣었다. 해당 안전센터는 녹취록과 답변서를 만들어 제출해야 했다. 안전센터 관계자들은 "민원이 부담스럽다 보니 타당하지 않은 요구라 해도 들어준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무료다 보니 구급차를 마치'장애인 택시'처럼 생각하는 시민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미국이나 프랑스처럼 응급과 비응급 환자를 엄격히 구분하고, 비응급 환자에게는 구급차 이용 때 돈을 받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승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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