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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변종모의 세계의 골목] "뛰어도 좋아" 층간소음이 즐거운 마을, 이란 마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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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게 내 지붕을 마당처럼 내어주는 곳, 예민하지 않고 긴밀한 사람들
“시끄럽냐고? 뛰면 좋은 일있나 싶어 나도 신나"
산비탈의 수평 아파트같이, 깎지 끼듯 연결된 마을

조선일보

산비탈을 깎아서 만든 작은 마을 마슐레. 지붕이 골목이고, 골목이 곧 지붕인 이상한 마을이다. 부산항에서 바라보는 감천마을 혹은 전철역에서 바라보는 북악스카이웨이쪽 성북동 같다. ./사진=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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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해로부터 번져오는 겨울안개가 밥 짓는 굴뚝의 연기처럼 뭉근하게 밀려오는 아침이면 허기가 졌다. 심하게 허기지는 아침이면 간밤의 꿈이 길었을 것이다. 끝없는 골목처럼 얽힌 꿈들이 자주 안개처럼 찾아오던 나날들이었다. 이 산중에 여행자라고는 나 밖에 없었던 이유로, 어떤 경쟁도 두려움도 없는 환대 속의 나날이었다.

그래서 날마다 꿈을 꾸었다. 좋은 꿈을 꾸었다. 불안을 동반하지않는 낯선 곳은 아주 오랜만이다. 더군다나 이란의 북쪽 깊은 산중의 마을 마슐레(Masuleh)였다. 아르메니아와 조지아가 합류하는 국경에서 멀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란의 최북단에 가까운 곳이었다.

카스피해의 거친 겨울안개와 살을 촘촘하게 저미는 추위가 날마다 구름처럼 찾아오는 이유로 외부인의 발길이 뜸했다. 산비탈을 깎아서 만든 작은 마을은 지붕이 골목이고, 골목이 곧 지붕인 이상한 마을이다. 바깥으로 드러난 개미굴 같기도 하고, 조각가의 엉성한 작품 같기도 하다. 한밤중에 방문하게 된다면 거대한 빌딩이라고 착각하게 될 수도 있겠다.

까만 밤하늘 산비탈 아래로 층층이 박힌 별빛 같은 불빛들을 무심하게 흘려보면 거대한 빌딩처럼 뭉쳐 있다. 집과 집의 간격이 없다. 그냥 길게 누워있는 아파트 같았다. 다만, 수직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수평으로 늘어선 구조가 여러 단으로 산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마치 부산항에서 바라보는 감천마을 같거나 전철역에서 바라보는 북악스카이웨이쪽 성북동 같았다.

◇ 여행자 없어, 여기저기서 사랑받는 귀한 손님된 기분

오래된 역사와 전통생활 방식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어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는 이란의 10대 관광지다. 그런데도 여행자가 없다. 덕분에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나는 귀한 손님이 되었다. 이러다 버릇없는 여행자가 될까 신경이 쓰일 정도였다. 겨울의 마슐레는 사랑하는 느낌이 아니라 확실히 사랑받는 느낌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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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고 환한 마슐레의 아이들./사진=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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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영문도 모르고 끌려오다시피 짐을 풀게 된 숙소는 겨울철에 문을 연 유일한 숙소였다. 숙소까지 도착한 배낭은 버스 뒷자리에 앉았던 학생이 한사코 자기가 메겠다며 들춰 업고 신나했다. 버스를 타고나서부터 숙소에 도착하기까지 내가 힘들여 한 일은 그들의 관심에 웃는 얼굴로 화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내 방은 골목 위 구름다리처럼 방바닥 아래로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창문을 열면 앞집의 옥상이자 골목이었고, 지붕위로 아이들이 지나가거나 조그만 수레들이 분주히 오가기도 했다. 누군가의 실수로 만들기 시작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무심코 쌓아놓은 블록 같은 집들이 그런 식으로 이어져 결국 마을을 이룬다. 그것도 경사가 급한 산의 각도를 따라 아름답게 치장되었다.

산이 두꺼운 겨울외투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집들은 산의 액세서리처럼 투박한 흙이나 돌로 엉겨 따뜻하다. 골목의 아래 칸은 주로 상점이나 찻집이 팔짱을 낀 듯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빵을 굽는 집이 마을의 맨 위쪽에서 저녁 짓는 굴뚝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군데군데 관공서나 예배당이 무심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게 전부다.

사실 부지런한 여행자라면, 한 시간이면 충분히 둘러볼 작은 마을이다. 딱히 볼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첩첩산중에 이런 마을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소중할 뿐이다. 하지만 여러 날 이 골목을 떠나지 못했다. 대장장이 할아버지가 아침에 차를 마시러 오라고 했고, 그 약속이 진심인 것 같아서 그러겠노라고 했는데, 대장간 잠시 들린 화가의 손에 이끌려 화실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는 식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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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지끼듯 옆으로 이어진 마을./사진=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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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집 앞은 지나갈 때마다 끌려갔고, 찻집은 자진해서 들어갔다. 하릴없이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불러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첩첩산중의 마을에서 예상외로 바쁜 여행자가 되었다. 골목이 깍지를 끼듯 결속된 것처럼, 사람들은 또 그렇게 살갑고 예스럽다.

◇ 지붕 위로 지나가는 사람들, 조금도 불편하지 않아

200원짜리 빵(바르바리라고 불리는두꺼운 난)을 굽는 청년에게 물었다. 지붕 위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면 시끄럽거나 신경 쓰이지 않은지. 화덕처럼 벌겋게 웃으며 그가 말했다. “이 마을 사람들은 급하게 뛰어다닐 일 없고, 만약 사람들이 신나게 뛰어다니면 좋은 일이 있는 거니까 자다가도 뛰어나가고 싶어진다고.”

안개가 심한 날이면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다. 내가 본 골목의 표정들과 골목에서 만난 사람들의 표정들을 그렸다. 대장장이 할아버지의 얼굴이었다가 빵 굽는청년의 표정이기도 했다. 찻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내가 그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했다. 차마 화가에게는 보여주지 못할 실력이지만 그들이 좋아했다. 마을의 지붕을 그리면 길이 되었고, 길을 그어나간 선들을 바라보면 어느 귀퉁이에서 누굴 만났는지 기억이 났다.

이것이 다시 꿈에 나타나거나, 어느 날 현실에서 꿈처럼 기억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주 그림을 그렸다. 안개처럼 희미해질 기억들을 선명하게 그어나갔다. 오래 기억하는 방법은 오래 마주하는 일이 가장 확실하겠지만, 잠시 지나가는 여행자였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골목들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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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할머니. 이 골목과 평생 많은 것을 나누며 살았을 것이다./사진=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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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은 천사들이 사는 곳.” 오래된 여행자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이었다. 그 말을 가장 실감나게 하는 곳이 이 산중의 깊고 가파른 골목에 있다. 단지, 긴 시간만이 인연의 결속을 보장한다면, 나는 여기서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과 내가 짧은 시간 동안에도 좁은 골목처럼 쌓아 올린 것이 있다. 나란히 차를 나누어 마셨고, 내가 걸어온 길에 대해서, 당신의 고단한 생활에 대해서 말없이 여러 잔의 차를 비웠다.

◇ 낯선 곳의 다정함, 말은 달라도 잘 웃고 들어주는 사람들

낯선 곳의 다정함이 발을 묶는다. 판단력을 흐린다. 마음이 약해진다. 자꾸만 마음에서 변명이 생겨난다.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던 사람들. 잘 웃어주고 끝까지 들어주던 사람들. 말이 달라도 웃는 게 같아서 가능한 일들. 사람들의 관심이 결코 성가시지 않는 이유는, 좋은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웃에게 나의 지붕을 마당처럼 내어주고, 나 또한 이웃의 지붕을 나의 길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은 예민하지 않고 긴밀했다.

왜? 성가시지 않겠는가? 왜? 불편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성가시고 불편함 보다 더 내밀한 것이 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하게 되는 골목. 골목의 간격이 그리 넓지 않으니 그만큼 가까운 일상. 골목이 이어 놓은 것은 길 뿐만 아니라 생활이거나 그 이상의 삶까지 연결시킨다. 함부로 그들의 삶을 이야기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아파트처럼 층층이 쌓아 올린 이 골목의 삶에, 한동안 여행자가 아닌 생활인으로 포함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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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부지런한 여행자라면, 한 시간이면 충분히 둘러볼 작은 마을이다. 딱히 볼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첩첩산중에 이런 마을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소중할 뿐이다./사진=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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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람~” 겨울 골목을 따뜻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그릴 수 없어도, 그리지 않아도 오래도록 기억날 것이다. 가슴에 손을 올리고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환한 얼굴들을 좁은 골목 어디에서나 만나는 곳. 어느 추운 겨울날, 낯선 손을 마주잡고 비탈진 골목의 안쪽을 걷는 꿈을 꾸게 된다면 분명 그곳일 것이다. 기억하지 않으려해도 그날의 기억들이 따뜻하게 찾아올 것이다.

PS 마슐레 찾아가기
북쪽에서 내려오거나 테헤란 쪽에서 올라가더라도 라쉿(Rasht)이라는 곳을 거치거나, 푸만(Fuman)에서 미니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고 올 수 있는 곳. 둘 다 비용은 아주 저렴하다. 합승택시나 미니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고 올 수 있는 곳. 둘 다 비용은 아주 저렴하다. 합승택시나 미니버스는 사람들이 다 차야 출발한다. 이란에서는 기다려야할 일이 기본적으로 많다.

마슐레는 주로여름 휴양지로 각광받는 곳이라 겨울철 방문에는 마음의 준비가 적당히 필요하다. 반대로 비수기의 혜택을 받을 수도 있다. 저렴한 숙소지만 아파트형 원룸처럼 욕실과 TV, 가스레인지 가스난로가 있고, 무엇보다 이 풍경을 한 눈에 다 볼 수 있는 테라스가 압권이다. 하지만 밤이 되면 눈물 나게 춥다
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변종모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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