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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단독]3번째 피해자 인터뷰 "연극계 묵인 속 이윤택은 '성폭력 교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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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 이승비 씨 “선생님이 단전호흡시켜 준다며 추행”
“동료들에 공개했더니 ‘술 먹고 공연 펑크 낸 애’ 낙인”
“사정시켜주면 배역 준다”는 이야기도 공공연히
얼굴 공개 실명으로 인터뷰…“연극은 영혼을 치유하는 것이기에”

상습적인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의혹이 제기된 연극 연출가 이윤택(67)씨에 대한 또 다른 폭로자가 나왔다. 극단 나비꿈 이승비(42) 대표다. 이 대표는 19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2005년 이윤택에게 당했던 성추행 당했던 당시의 일을 고발했다.지난 14일 김수희 극단 미인 대표가 이윤택의 성추행 사실을 공개한 것을 시작으로 이번이 세 번째 폭로다.

이날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평창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 대표는 성범죄를 당했던 순간의 일을 털어놨다. 당시 그는 이윤택의 성추행 사실을 극단 행정실에 이야기했지만, 다들 그의 말을 못 알아 들은 척 했다고 한다. 대신 그에게 돌아온 것은 줄어드는 출연횟수였다. 이후 10년간 한국을 떠났다. 2012년 귀국한 이 대표는 2년 뒤 나비꿈이라는 극단을 만들었다.

이 대표는 “(이윤택의 성폭력을)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말하지 못 했다. 그는 연극이라는 세계의 왕, 종교집단의 교주와도 같아서 감히 그의 허물을 지적할 수가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이승비 극단 나비꿈 대표는 19일 기자와 만나 과거 당했던 성추행을 실명으로 인터뷰했다. “연극을 사랑해서”라고 했다. /김명진 기자


-이윤택 씨를 언제 처음 알게 됐나?
“선생님을 처음 만난 건 2004년, 밀양에서였다. 연극 ‘농업소녀’에 캐스팅되서 밀양 연희단거리패에서 한 달 동안 합숙하며 연습을 했다. 이 때 이 선생님의 눈에 들었다. 선생님이 2005년 국립극장 예술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그가 연출한 작품의 여주인공 역을 제안 받았다. 객원단원으로 참여해 6개월간 연습을 했고 총 10회 공연 중 7회에 출연하기로 계약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이윤택에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꼬박 붙였다. 연극에 발을 들인 20대 때부터 ‘선생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성추행 당시 상황을 이야기해 줄 수 있나.
“2005년 9월 낮이었다. 오전 연습이 끝나고 나더러 따로 남으라고 했다. 공연장이 큰 데 발성 연습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아무런 의심 없이 단 둘이 남아 발성 연습을 하는데, 대사를 읊는 도중에 (이윤택이) 횡경막쪽을 만진다면서 내 가슴을 만졌다. 참았다. 단전 호흡이 안 되는 거 같다면서 배꼽 아래쪽까지 손이 내려갔다. 가슴이 쿵 하고 떨렸지만 울기만 했다. 어느 순간 손이 내 사타구니까지 닿더라. 무슨 힘이 났는지 순간 선생님을 양손으로 밀쳐내고 도망쳐나왔다.”

-국립극장 단원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나?
“정신을 가다듬고 극장 행정실을 찾았다. ‘이윤택 선생님께 성추행을 당했다’고 말했는데도 다들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못 들은 것처럼 제 할일만 했다. 마치 유령이 된 기분이었다. 이윽고 행정실 여자 직원이 ‘승비씨, 공연 7회 출연에서 5회 출연으로 바꾸라고 이윤택 감독님이 말씀하셨어요. 알고계세요’라고 말했다. 충격을 받았다. 그 길로 집에 가서 신경안정제를 먹었다. 그날 집에 있다가 다시 극장에 나가려는데 갑자기 쓰러져 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 다음부터 국립극장에는 ‘술 마시고 공연을 펑크낸 애’로 소문이 났다. 마녀사냥이었다. 이윤택 선생님을 고발한 대가였다. 이후 연극계를 떠나 독일에서 마음 정리 하는 시간을 가졌다.”

조선일보

연극인 이윤택씨는 19일 기자회견을 열고 “법적 책임을 포함해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고 말했다. /김명진 기자


-왜 외부에는 신고하지 않았나?
“경찰에 알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이윤택 선생님은 연극이라는 세계의 왕이다. 아니, 이 표현도 부족하다. 어떤 종교집단의 교주다. 동료들도 이 선생님이 이렇게 여러 명의 여배우를 대상으로 여러 차례 성추행 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말리거나 그의 행동을 비판할 순 없었다. 짤린다. 극단에서 퇴출당한다.

-이윤택씨는 19일 기자회견에서 “(성폭행을 주장하는 여배우와) 성관계를 했지만 강제가 아니었다”고 했는데.
“당시에는 극단 내부에서는 ‘선생님 방에 들어가서 사정하게 해주면 다음날 배역이 달라졌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윤택 선생님이 특정 배우를 극찬하거나, 어느날 갑자기 배역이 달라진 배우가 있다면 공공연히 “쟤가 어제 선생님을 ‘싸게’ 해줬다”는 말이 돌았다. 이런 분위기에 발을 담그는 순간 집단 최면에 걸리게 되는 것 같다.”

-다른 피해자들은 없었나?
“밀양 극단에는 이윤택 선생님이 별채로 쓰시던 황토방이 있다. 이 방에는 다른 배우들이 번갈아가며 들어갔다. 한 달 정도 합숙 훈련하는 동안 봤는데 그 방을 드나드는 배우가 매일 바뀌었다. 그의 공연에 발 담는 여성 배우들은 모두 한번씩 그의 방을 거쳐갔다고 보면 된다. 동료들은 쉬쉬한다. 동료 여성 배우들은 ‘우리도 이미 다 했는데’ 같은 반응이고 남성 배우들은 대화 소재로 언급하는 것을 꺼리고 쉬쉬한다. 겁나기 때문이다. 이 선생님께 성추행 당했다가 극단을 뛰쳐나온 한 친구도 결국 다시 극단에 돌아왔다. 그 친구는 이후 이 선생님에게 또다시 성폭행을 당했다.”

-연극계에 특히 성추문이 많다고 생각하나.
“연극은 대중화한 예술이 아니다. 일반인들과 다소 거리를 둔 예술이다. 마니아들만 찾는 장르다 보니 은폐 되는 부분이 많다. 성폭력 문제도 마찬가지다. 나이 어리고 학벌도 변변치 않지만 연기가 하고싶어 맨몸으로 연극판에 뛰어든 애들, 기초 배우려는 애들은 가르침을 받는다는 명목으로 이 같은 성폭력을 참는다. 대부분은 성폭력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감내해야 할 관문’이라고 여긴다. 현실이 그렇다. 대학에서 연기를 배우고 이쪽에 발을 들이는 이들은 성폭력 상황에 놓이게 되면 거절하고 다른 쪽으로도 줄을 대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곧장 현장에 뛰어든 연극인들에게 이윤택 선생님 같은 감독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신’이다.”

-얼굴을 이렇게 공개하면서 인터뷰하는 이유를 물어도 되나.
“연극을 사랑해서다. 사랑하는 연극계에서 더이상 성추행이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사람의 몸을 치료해주는 직업이 의사라면 사람의 영혼을 치유해주는 직업은 연극배우라고 생각한다. 나와 같은 꿈을 꾸고 연극계에 발을 들이게 될 후배들은 앞으로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김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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