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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 (화)

[매경포럼] `장하성 특사팀`을 워싱턴DC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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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한국의 경제위기라면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슬그머니 넘어간 위기도 많았다. 2003년 3월도 그랬다.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 직후였다. 미국계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와 S&P가 한국의 신용등급을 무려 두 단계나 강등할 것이란 첩보가 날아들자 정부와 청와대, 경제계가 발칵 뒤집혔다. 표면적인 이유는 북학 핵문제였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딴 데 있다는 의견이 많았다. 노 대통령의 '반미 좀 하면 어떠냐' 성향이 미국을 자극했다는 해석이 많았다. 한국이 '국제 왕따'로 내몰릴 수 있는 위기였다.

대응은 비교적 신속하게 이뤄졌다. 당시 반기문 대통령 외교보좌관(훗날 유엔 사무총장), 차영구 국방부 정책실장, 권태신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훗날 국무조정실장, 현 전경련 부회장)이 미국 뉴욕으로 날아갔다. 이들은 무디스와 S&P 본사 등을 찾아가 '시간을 좀 더 달라'며 신용등급 강등의 부당함을 역설했다. 현역 육군 중장이었던 차 실장은 별 3개 계급장이 달린 정복 차림으로 면담 분위기를 압도했다. 막무가내 읍소 전략으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무디스가 끝내 신용전망(신용등급이 아닌)을 하향 조정했지만 위기감이 한풀 꺾인 후였다.

그로부터 15년이 흘렀다. 얄궂게도 지금 상황은 북한에 끌려다니고, 미국에 시달린 2003년과 닮은꼴이다. 특히 미국의 한국 때리기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다. 한국의 대미 수출뿐만 아니라 금융·자본시장을 위협할 수도 있는 신호를 계속 내보내고 있다. 세탁기·태양광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와 GM 군산공장 가동 중단 선언은 서곡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난 주말 공개된 '무역확장법 232조' 보고서는 충격적이다. 미국 상무부는 한국을 제재하기 위해 '한국산 철강제품이 미국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는 논리까지 동원했다.

이제는 합리적 의심이란 걸 해볼 때가 됐다. 미국이 왜 일본, 캐나다, 유럽연합(EU)은 빼고 한국만 집요하게 두드리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단순히 '아메리카 퍼스트'의 유탄인 건지, 한국 정부의 친중(親中) 행보가 불만인 건지, 최근 대북정책이 불안한 건지 등을 냉정히 살펴봐야 한다.

아마도 이게 끝이 아닐 것이다. 미국이 한국 경제를 두드릴 수단은 많다. 다음은 신용등급 강등일 수도 있고 반도체 특허분쟁이나 환율일 수도 있다. 미국계 자본의 한국 증시 이탈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이미 많은 사람이 경제 분야에서 시작된 동맹 균열을 걱정하고 있다.

국가 운명을 함께하는 동맹 관계에서 정치, 안보, 경제가 따로 돌아갈 리 없다. 한미동맹이 이를 증명한다. 1997년 외환위기 때 미국이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한미 통화스왑이 덜컥 체결된 것도 한미동맹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역시 한미동맹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역사와 전통을 조속히 복원시켜야 한다. 너무 늦기 전에 책임 있는 당국자 그룹을 미국에 보내 직접 사정을 설명하는 성의를 보일 필요가 있다. 이번 특사팀은 뉴욕이 아니라 워싱턴DC를 누벼야 할 것이다.

2003년 특사팀은 여러모로 참고할 만하다. 당시 '반기문-차영구-권태신'으로 팀을 꾸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미국 조야의 작동 원리를 잘 이해한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능숙한 영어로 한미동맹의 '큰 그림'을 진정성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최근 돌아가는 사정은 촌각을 다투는 수준이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북한 문제 등으로 짬을 내기 어렵다면 경제정책을 맡은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나서도 좋을 것이다. 국제 인지도, 유창한 영어 실력과 함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와튼스쿨 동문이라는 사실도 플러스 요인이 될 수 있다. 해병대 중령 출신으로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을 지냈던 여석주 국방부 정책실장과 국제금융통인 김윤경 기획재정부 국제금융국장의 조합도 꽤 휼륭해 보인다.

결국 성패는 한미동맹 미래가치를 얼마나 진정성 있게 설명하느냐가 될 것이다.

[이진우 증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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