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바바가 미국 증시에 상장한 중국 기업으로는 최초로 시가총액 5000억달러를 돌파했다. 이는 페이스북에 조금 못 미치고 삼성전자, 넷플릭스, 테슬라보다 훨씬 높은 시총이다. 일각에서는 알리바바의 1조달러 시총 연내 돌파 전망도 나온다. 사진은 2014년 9월 19일 알리바바가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하던 날 마윈 알리바바 회장이 상장을 알리는 벨을 치기 위해 망치를 손에 쥐고 흔드는 모습. (A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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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5일,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서 또 하나의 신화가 탄생했다. 중국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가 시가총액 5000억달러(약 535조원)를 돌파한 것. 중국 기업으로는 텐센트에 이어 두 번째고 미국 뉴욕 증시에 상장한 중국 기업으로는 최초 사례다. 1월 말 기준 알리바바 시총은 5242억달러. 애플(8517억달러), 구글(8170억달러), 마이크로소프트(7330억달러), 아마존(7000억달러)에는 아직 못 미치지만 페이스북(5431억달러)을 바짝 뒤쫓고 삼성전자(3010억달러), 넷플릭스(1173억달러), 테슬라(598억달러)는 가볍게 제친다. 향후 전망은 어느 기업보다 밝다. 미국 증권사 MKM파트너스는 지난해 12월 “향후 1~3년 내 다수의 IT 공룡 시총이 1조달러를 넘어설 것이다. 특히 알리바바는 애플,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텐센트보다 한발 먼저 고지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알리바바에는 매일 1억명이 접속해 물건을 구매한다. 중국 전역에서 오가는 소포 양의 약 70%가 알리바바그룹 산하 쇼핑몰에서 발생할 정도다. 현재 알리바바를 통해 이뤄지는 거래는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2%에 이른다. 특히 ‘중국판 블랙프라이데이’로 불리는 ‘광군제(光棍節·독신자의 날)’ 행사에선 지난해 11월 11일 하루 동안 1682억위안(약 28조308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지난해보다 40% 급증한 수치로, 국내 전자상거래 연매출 규모 65조원의 절반에 해당한다. 알리바바는 어떻게 중국을 넘어 세계 최대 쇼핑몰이 됐을까.
▶실패의 연속이었던 창업 초기
▷낙방·횡령…‘그래도 희망은 인터넷’
알리바바 창업 스토리의 시작은 마윈 알리바바그룹 회장의 실패 스토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오늘날의 알리바바를 일구기까지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다.
‘성공’이라는 단어는 학창 시절부터 그와 가깝지 않았다. IT 기업인답지 않게 ‘수포자(수학 포기자)’였던 그는 삼수 끝에 턱걸이로 항저우사범대에 입학한다. 군 입대와 경찰 모집에 응시했지만 162㎝, 45㎏에 불과한 왜소한 체격 때문에 거부당한다.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원서를 낸 30여개 기업에서 모두 낙방했다. 월급 1만5000원을 받으며 영어강사로 일하다가 창업을 결심한 그는 1990년대 초반, 자신의 특기를 살려 영어 통번역 회사인 ‘하이보’를 설립했다.
그러나 회계 직원의 잦은 실수와 공금횡령으로 문을 닫아야 했다. 영어 실력만은 출중했던 그는 이후 미국 출장길에 친구 사무실에서 인터넷을 처음 접하고 깊은 인상을 받는다. 검색창에 ‘beer(맥주)’를 입력하니 즉시 많은 정보가 떴지만 중국어 검색 결과는 하나도 없었다. 인터넷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확신한 그는 1995년 고향인 중국 항저우로 돌아와 ‘차이나옐로페이지’라는 인터넷 홈페이지 제작 대행 사업을 시작한다. 미국의 서버를 빌려 중국 기업에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중국에서 ‘인터넷 개척자’ ‘인터넷 여왕’이라 불리는 1세대 검색엔진 기업 ‘장수신’보다도 반년가량 앞선 창업이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에는 인터넷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고객이 있을 리 없었다. 오늘날 인터넷 사용자 수는 20억명이 넘지만 1995년 당시 전 세계 인터넷 사용자 수는 5만명이 채 되지 않았고 전 세계 인터넷 업계 종사자 수도 5만명 미만이었다. 1995년 8월 차이나텔레콤이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반 장짜리 이미지 하나를 전송하는 데만 3시간 반이 걸릴 만큼 속도가 느렸다. 마윈 자신도 “이메일이 뭔지도 몰랐다”고 돌아볼 정도다.
일화 하나. 마윈이 처음으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어준 곳은 항저우에 있는 ‘왕후호텔’이었다. 그는 호텔 사장에게 중국어와 영어로 된 안내문을 받아, 보기 좋게 문서로 만들어 인쇄한 뒤 국제우편으로 미국 시애틀에 있는 협력업체에 보내 홈페이지를 만들게 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아무리 홈페이지를 잘 만들어도 인터넷이 없는 중국에서는 왕후호텔 사장조차 홈페이지를 볼 수 없었다. 마윈은 “외국에서 이 홈페이지를 보는 사람이 있을 테니 기다려보라”고 말했지만 왕후호텔 사장은 “돈을 지불할 수 없다”며 그를 사기꾼 취급했다. 중국에서 인터넷 사업을 하려면 ‘인터넷이라는 것이 진짜 존재한다’는 사실부터 증명해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곧 마케팅 효과가 나타났다. 1995년 베이징에서 ‘UN 제4차 세계여성회의’가 열리자 베이징을 방문하는 미국의 여성 대표들이 인터넷에서 중국 숙소를 검색, 왕후호텔의 홈페이지를 보고 연락을 해왔다. 왕후호텔 측은 항저우가 베이징에서 1000㎞도 더 떨어진 곳이라고 말했지만 여성 대표들은 그래도 오겠다고 말했다. 마윈 회장은 “나는 만일 모든 중국 기업이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든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겠다고 직감했다”고 회상한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더 본격적으로 인터넷 사업에 뛰어든다. 1997년에는 중국 대외경제무역부의 공식 사이트를 개설하고 정부와 산하 무역업체 간 인터넷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부당한 대우에 실망한 그는 1999년 2월 동료 17명과 함께 자본금 50만위안(약 8400만원)을 모아 전자상거래 사이트 ‘알리바바닷컴’을 개설했다.
역시 시작은 녹록지 않았다. 처음부터 알리바바를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는 포부로 마윈은 미국으로 건너가 투자자를 모집했지만 40여곳 회사에서 모두 퇴짜를 맞았다. 그를 알아본 건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었다. 2000년 1월 손정의 회장은 베이징에서 마윈 회장을 만나 20분으로 예정된 그의 브리핑을 6분 만에 끊고는 단번에 2000만달러 투자를 결정했다. 당시 소프트뱅크가 중국 내 신생 IT 기업에 투자한 평균 금액(20만달러)의 100배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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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공룡 ‘이베이’를 내쫓다
▷공짜 마케팅·에스크로·메신저로 압승
알리바바는 초기에 B2B(기업 대 기업) 쇼핑 플랫폼 사업에 집중했다. 통상적인 전자상거래가 B2C(기업 대 소비자) 또는 C2C(소비자 대 소비자) 모델인 것과 차별화된다. 소매 시장보다 도매 시장을 노린 셈이다. 중국 각지의 납품업자와 중소 제조업체는 알리바바에서 만나 이메일로 제품과 가격을 조율하며 편리하고 합리적으로 거래할 수 있었다.
안정적으로 성장하던 알리바바에 2003년 위기가 닥친다. 글로벌 전자상거래 강자인 이베이가 중국 전자상거래 기업 ‘이치(易趣)넷’을 인수하며 중국 시장에 진출한 것. 아마존도 뒤질세라 이듬해인 2004년 중국 전자상거래 업체 ‘조요닷컴(Joyo.com)’을 인수, 대륙의 문을 두드렸다. 알리바바는 이베이와 아마존이 기존 사업인 C2C는 물론, 알리바바의 B2B 시장에도 진출할 것으로 우려했다. 이를 막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한 건 알리바바가 먼저 C2C 시장에 진출, 이베이의 확장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판단한 셈이다. 마침 급성장하는 C2C 시장을 눈여겨봐오던 참이기도 했다.
알리바바는 C2C 쇼핑몰 ‘타오바오(淘寶)’를 열고 이들에게 맞불을 놨다. 타오바오의 핵심 무기는 바로 ‘공짜’였다. 손정의 회장으로부터 2004년 8200만달러를 추가 유치받은 마윈은 이 돈으로 공격적인 무료 정책을 펼친다. 다른 쇼핑몰들이 거래금액의 2%를 수수료로 책정한 데 반해 타오바오는 수수료는 물론 등록비, 검색 추천비도 받지 않았다. 순식간에 타오바오로 회원이 몰린 건 당연지사. 여기에 2004년 선보인 알리페이와 메신저 서비스 ‘왕왕(旺旺)’은 타오바오의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 거래 당사자 간의 신뢰가 부족했던 당시 중국 전자상거래 시장에서 알리페이는 ‘에스크로’ 서비스를 실시, 이용자들의 안심 거래를 도왔다. 또 왕왕은 소비자와 판매자가 실시간으로 채팅하며 상품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거나 배송료 할인 등을 요구하는 창구가 됐다.
이 같은 전략에 힘입어 타오바오는 오픈 6개월 만에 글로벌 사이트 100위 안에 올랐고 9개월 후에는 50위 이내, 1년 후에는 20위 이내로 순위가 급상승한다. 2005년 초에는 타오바오 회원 수가 600만명을 돌파했다. 1000만명 회원을 거느린 이베이보다는 적었지만, 취급 상품 수와 검색량, 거래금액 등 실질적인 지표는 모두 이베이를 넘어섰다. 이후 타오바오가 수수료를 유료화했지만, 판매자와 소비자는 이미 중국 최대 온라인 시장이 된 타오바오를 계속 이용했다. 결국 이베이는 2006년 중국 시장에서 철수했다. 아마존도 2016년 말 기준 중국 시장점유율이 1%대에 그친다.
2007년 타오바오는 시장점유율 70%에 육박하는 독점 기업으로 발돋움한다. 알리바바는 2008년 기업형 판매자들을 위한 B2C 사이트 ‘티몰’도 시작하며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경영 시사점
▷비전 리더십·수평적 조직문화 통했다
알리바바의 성공 비결을 얘기할 때 마윈 대표를 빼놓을 수 없다. 마윈 회장은 이제 중국에서 성공한 기업가를 넘어 미래를 내다보는 사상가이자 경영 구루로 대접받는다. 알리바바가 사업 초기 골드만삭스, 소프트뱅크 등 세계적인 투자사로부터 자금을 유치한 것도 마윈 회장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마윈 회장은 지난 20여년간 전자상거래 시장에 대한 비전을 흔들림 없이 지켜나갔다. 유망 기업이 대부분 그렇듯, 알리바바도 성장 과정에서 수차례 인수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마 회장은 번번이 거절했다. 회사의 성공 가능성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일례로 마 회장은 투자가 절실한 사업 초기에도 투자자를 가려 받았다. 1999년 10월 골드만삭스로부터 500만달러를 받은 게 처음이다. 첫 투자 수준이 다음 투자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손정의 회장이 2000만달러를 투자한 것도 처음에는 4000만달러를 제안했지만 마 회장이 “그렇게 많은 돈은 필요 없다”며 절반으로 깎은 결과다. 타오바오와의 경쟁에서 밀린 이베이가 타오바오 인수를 제안했을 때도 마 회장은 단칼에 거절했다. 회사 성장에 대한 마 회장의 이 같은 굳은 신념은 알리바바에 대한 대내외 신뢰를 높이고 일관된 경영 전략을 펴는 데 밑거름이 됐다.
고객의 욕구를 정확히 파악한 것도 주효했다. 사용자가 타오바오 사이트에 머무르는 시간은 25분 이상. 경쟁사인 아마존(9분)은 물론, 소셜미디어 업체인 트위터(16분)보다도 월등히 길다. 타오바오가 고객을 오래 붙잡을 수 있는 비결은 여러 가지다.
“(세계 최대 쇼핑몰로서) 광범위한 쇼핑 품목을 확보하고 있다. 타오바오에서 사고자 하는 품목을 검색하고, 선택하고, 결제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정도”라는 게 텅 빙셩 장강경영대학원 유럽캠퍼스 부총장 겸 전략경영학 교수의 진단이다. 타오바오 메신저 ‘왕왕’도 쇼핑을 하면서 흥정과 친목을 즐기는 중국인들의 성향을 꿰뚫어본 서비스다. 토토 쑨 전 타오바오 CEO는 “중국인들은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친구를 사귀기를 좋아한다. 타오바오는 거래를 하는 것과 친구를 사귀는 것에 대한 이용자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다른 친목 웹사이트들과 달리 여기서는 거래를 위해 친구를 사귄다”고 말했다. 마윈 회장은 지난 1월 다보스포럼에서 “알리바바는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그다음이 직원, 마지막이 주주다. 비록 월가의 환영은 받지 못하지만 이런 기업 가치관을 앞으로도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평적인 조직문화는 알리바바의 보이지 않는 소프트파워다. 알리바바는 프로젝트가 생기면 직원들이 단톡방을 운영하고, 그래도 답이 안 나오면 사장은 물론 마윈 회장까지 토론에 참여한다. 타오바오가 신사옥으로 이전할 때 셔틀버스를 운영하지 않기로 하자 직원들은 사내 인트라넷에 “마윈 회장은 기사가 딸려 있지만 우리는 힘들다”는 식의 실명 비판을 하기도 했다.
마윈 회장은 각종 인사제도를 통해 이런 소통 문화를 장려한다. 인터넷 시대에는 젊은 감각이 필요하다며 임원진의 연령대를 30~40대로 꾸준히 유지하는 게 대표적인 예다. 알리바바그룹의 경영진 중 1970년대생(70後 세대)은 45%, 1980년대생(80後 세대)은 52%에 달한다. 장융 알리바바그룹 CEO도 1972년생(46세)이다. 1960년대생(60後 세대)은 3%에 불과하다. 또 알리바바는 창업 초기인 2003년부터 모든 직무 후임자를 위한 연수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인사 평가에 팀워크와 가치관 항목을 포함시켰다. 매출, 영업이익 등 경영 성과에 치우쳐 조직문화에 융화되지 못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다.
양성 평등도 실현했다. 알리바바의 여성 직원 비중은 절반인 49%에 달한다. 이처럼 여성 직원 비중이 높은 이유를 묻자 마윈 회장은 “묻기 전에는 의식조차 못했던 문제”라고 말했다. 일부러 의도한 게 아니라, 편견 없이 실력만으로 채용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리 됐다는 얘기다.
인터뷰 | 텅 빙셩 장강경영대학원 유럽캠퍼스 부총장 겸 전략경영학 교수
中 시장선 글로벌 마인드+중국식 액션 필수
텅 빙셩(Teng Bingsheng) 장강경영대학원 유럽캠퍼스 부총장 겸 전략경영학 교수는 뉴욕시립대(City University of New York)에서 박사 학위를 이수한 ‘전략적 제휴(Strategic Alliance)’ 부문 권위자다.
Q 지난해 광군제에서 알리바바는 또다시 역대 최고 매출을 경신했다. 광군제 마케팅은 알리바바에 있어 어떤 의미인가.
A 광군제의 의의는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광군제는 새로운 온라인 쇼핑 축제로서, 알리바바의 플랫폼을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타오바오(Taobao)와 티몰(Tmall)의 존재감을 소비자들에게 다시금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둘째, 마윈 회장이 최근 강조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자원을 통합적으로 활용하는 새로운 쇼핑 콘셉트 ‘뉴 리테일(New Retail)’을 실현한다. 셋째, 중국에서 광군제가 진행되는 11월은 대개 쇼핑 비수기다. 소매업체 입장에서는 이듬해 판매할 상품이 들어설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상당량의 재고를 처리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11월은 소비자도, 소매업체도 한바탕 쇼핑을 즐기기에 좋은 시기라 할 수 있다.
Q 마윈 대표의 리더십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A의심할 바 없이, 마윈 회장은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과 더불어 중국에서 가장 독보적인 비즈니스 리더다. 마윈 회장은 비전과 기업문화를 중시하고 ‘상향식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는 리더십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 알리바바는 알리바바만의 독특한 기업문화를 구성하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 매우 고객지향적이고 팀워크와 성과를 중시하며, 핵심 원칙에 대해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
Q 알리바바의 성공이 중국 시장의 독특한 문화에서 기인한 부분도 있지 않나. 해외 기업이 알리바바를 벤치마킹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면.
A 몇 가지 정책상의 이슈를 포함한 중국 시장의 독특한 특징들이 알리바바의 성공에 기여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아마존의 경우, 처음에는 중국 시장에서 좋은 성과를 보였다. 비즈니스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다기보다 유연하지 못한 모습 때문에 타오바오와의 경쟁에서 뒤처쳤다. 중국에 진출하는 다국적 기업은 글로벌적으로 사고하되 중국식으로 행동해야 한다. 중국 현지 팀이 직접 전략을 수립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도 방법이다.
[노승욱 기자 inye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45호·설합본호 (2018.02.07~2018.02.2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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