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 |
유럽에 가니까 기도발을 받을 만한 영험(靈驗)한 터에는 거의 수도원이나 성당·교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아서 서양인들도 어디가 영지(靈地)인가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영지는 거의 불교가 독점하고 있다. 불교는 1700년 전부터 한반도에 들어와 일찌감치 좋은 명당을 선점하였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위기 상황에 봉착한다. 이를 '산진수궁의무로(山盡水窮疑無路)'라고 표현한다. '산이 막히고 물길이 끊어져서 길이 안 보이는 상황'이다. 이때 기도처를 찾아야 한다.
설악산 봉정암 전경. |
내가 기도해본 기도처를 꼽아본다면 설악산 봉정암(鳳頂庵)이다. 백담사에서 5~6시간을 바위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도달하는 선경(仙境)이다. 우리나라 악산(岳山)을 대표하는 설악산인 만큼, 그 바위와 암벽들이 주는 웅장한 압도감이 있다. 기도터는 웅장한 압도감이 있어야 한다. 봉황의 정수리 터에 잡은 암자라고 해서 이름도 봉정이다. 봉정암은 바위가 쩔쩔 끓는 느낌을 준다. 그만큼 기도발을 주는 화강암 바위들이 물샐틈없이 둘러 쌓여 있다. 3일만 제대로 기도하면 나름대로 효험이 있다. 필자는 건강에 이상이 생겼을 때 여기 가서 매달렸다.
경남의 남해 보리암도 효험을 본 기도처이다. 바위와 바다가 어우러져서 봉정암과는 다른 기운이 나오는 곳이다. 봉정암이 화기(火氣)가 충만한 곳이라면, 보리암은 화기와 수기(水氣)가 서로 섞인 곳이다. 화기는 집중을 주고 수기는 이완을 준다. 내 경험에 의하면 보리암은 긴장을 이완(弛緩)시켜 주는 데서 오는 기도발이 작용하는 터이다. 집중에서도 기도발이 오지만 이완에서도 기도발이 온다.
보리암은 인생의 공허감을 달래주는 기도터이다. 청도 운문사 사리암도 영험하다. 이 터의 형국이 마치 압력밥솥처럼 생겼다. 기운을 푹 찐다. 여성 기도객들이 이용하기에 편리하다. 고창 선운사 도솔암은 묵은 영가(靈駕·영혼) 떼는 데 효과 있다. 무협지에 나오는 장문인(掌門人)이 거처할 만한 풍광을 지녔다.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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