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경제에서 中 비중 높지만 자유·민주 등 정체성 지키기 위해 백서 통해 "美國 힘에 의지" 결론
제 목소리 못 내는 우리와 대비
이철민 국제 선임기자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갖던 작년 4월 6일 뉴욕타임스에는 이런 전면 광고가 실렸다.
"두 나라는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에서 벗어나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 이 '함정'은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역사가이던 투키디데스가 신흥 강국 아테네의 '급부상'과 기존 패권국 스파르타가 느낀 '두려움'이 펠로폰네소스전쟁의 원인이라고 진단한 것에 기초해 미국 국제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교수가 2013년 만든 용어다.
두 초강대국은 이 '함정'을 피하면 되지만, 둘 사이에 낀 나라들은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GDP(국내총생산) 기준 세계 13위인 호주의 지난 수년간 모습이 딱 그 짝이다. 호주의 많은 경제지표에서 '중국'은 1, 2위다. 전체 수출액의 32%가 중국으로 가고, 중국 관광객 숫자(125만명)는 이웃 뉴질랜드 다음으로 많다. 호주산 광물·에너지 자원을 수입하는 나라도 중국(610억달러)이 2위인 일본의 배가 넘는다.
여기에다 중국 유학생 15만7000명과 주요 대학마다 설치된 '공자학원'은 호주 대학 안에서 중국에 대한 어떠한 비판이나 이견(異見)도 잠재울 정도다. 주요 정당에 들어간 외국 정치자금의 80%는 화교(華僑)를 통한 중국 돈이다. 사회 곳곳에 중국의 노골적인 입김이 거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호주 정부는 작년 11월 말 '외교정책 백서'를 내놓았다. 14년 만이다. 중국이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 판결을 무시하고 최근까지 군사기지 7곳을 구축한 남중국해 난사군도(南沙群島)의 암초들에 대해 이 백서는 "일부 강대국이 국제법을 무시하거나 훼손하고 있다"고 중국을 정면 겨냥했다.
이어 "미국의 강력한 안보 개입이 없다면, 역내 권력은 더 빠르게 (중국 쪽으로) 이동할 것이고, 호주의 안보와 안정을 이루기 더욱 어려워진다"고 밝혔다. 인도·태평양의 일부 지역에선 중국의 힘과 영향력이 미국을 이미 추월했다고 평가했다. 여태 호주의 국방·외교 백서에선 없던 솔직한 표현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건 "호주의 미래 안보와 번영은 현재 룰(rule·규칙)에 기초한 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데 달렸고, 이를 위해 미국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는 이 백서의 결론이다. 호주가 맞은 국제적 도전은 세계에서 가장 잘살고 혁신적이고 강력한 나라와 해결해야 하며 "미국의 글로벌 지도력을 지원하는 게 호주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 백서에 따르면, 2030년 중국의 GDP는 42조4000억달러로 같은 해 미국(24조달러)을 훨씬 웃돈다. 그런데도 '미국'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미국과의 동맹' '중국과의 무역 심화'라는 두 바퀴를 굴리면서 자유민주주의와 정치·경제·종교의 자유, 인권, 법치(法治)와 민주적 제도에 기반한 호주의 정체성(正體性)을 반드시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호주는 수사(修辭)를 넘어 실천도 하고 있다. 인도·일본·미국과 작년 말부터 인도·태평양에서 ▲국제법 준수 ▲남중국해 항해·항공의 자유 ▲룰이 지배하는 질서 등 공유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한 4개국 협의를 시작한 것이다. 일본과는 올해 처음 합동 군사훈련도 실시한다. 호주 자유당 정부의 이런 선택에 대한 반발도 있다. 케빈 러드 전(前) 총리(노동당) 같은 지중파(知中派)는 "중국을 상대로 지하드(jihad·성전)를 벌인다"고 비판한다.
우리는 북핵에 매달리느라 또는 '더 큰 보복'이 두려워서 사드 배치를 둘러싼 중국의 온갖 횡포에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남중국해에는 우리 원유의 90%, 수출입 물량의 30%도 통과한다. 호주 백서가 강조한 '룰에 기초한 국제 질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체성은 우리가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 된 토대이기도 하다. 그 '가치'를 재확인케 한 남의 나라 외교 백서에 눈길이 가는 이유다.
[이철민 국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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