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뮤지컬 '레드북' 안나役에 더블 캐스팅된 아이비·유리아
"누군가 상처받을까 조심히 연기… 여성들, 우리 노래 듣고 용기 갖길"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M씨어터에서 공연 중인 창작 뮤지컬 '레드북'(연출 오경택)의 포스터 문구다. 게다가 '유쾌하고 발칙한 로맨스 뮤지컬'이라는 수식어라니. 객석을 매회 95% 이상 꽉꽉 채우며 흥행 중인 이 뮤지컬의 주역은 여주인공 '안나' 역에 더블 캐스팅된 아이비와 유리아.
창작 뮤지컬‘레드북’의 여주인공 안나 역 배우 아이비(오른쪽)와 유리아는“화려한 무대나 세트 없이도 브로드웨이 라이선스 뮤지컬보다 훨씬 재밌다는 동료 배우들의 칭찬이 가장 기쁘다”고 했다. 장난감 칼과 해적 모자는 극 중 노래‘낡은 침대를 타고’를 부를 때 사용하는 소품. /박상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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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종M씨어터 객석에서 마주 앉은 두 배우에게 작품의 매력을 물었더니, 아이비가 먼저 장난스레 웃었다. "처음엔 포스터 문구처럼 야한 이야기인가 싶어 다들 솔깃하세요. 그런데 보고 나면 제대로 뒤통수를 치는 한 방이 있죠." 유리아는 "1막 엔딩 곡이 '난 야한 여자야~' 하는 고음 폭발로 마무리되는데, 처음엔 작가가 미쳤나 싶었다"며 웃었다. "야한 상상 한다면서 여배우들이 목까지 단추를 다 잠그고 나와요. 가벼운 터치지만 묵직한 메시지가 있고, 볼 땐 재미있는데 끝나면 여운이 남는달까요." 작품에 대한 자부심이 뚝뚝 묻어난다.
여성 차별과 편견이 만연한 영국 빅토리아 시대, 주인공 안나는 솔직한 연애 상상을 담은 소설을 썼다가 물의를 빚고 곤경에 빠진다. 남성 평론가의 추행 시도에 '한 방'으로 맞섰다가 폭행범으로 몰리는데, 한껏 희화했음에도 껄끄러움이 남는다. 권위와 지위를 무기로 몹쓸 짓을 해온 남자들 행태를 잇따라 폭로하는 요즘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서일 것이다. 유리아는 "혹시 누군가 상처받지 않을까 조심해 연기한다. 하지만 다 아는 사실을 감추기만 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닐 것"이라고 했다. 아이비 생각도 같았다. "자기 잘못도 아닌데 피해 여성이 수치스러워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잖아요. 숨을 게 아니라 안나처럼 꿋꿋하게 어깨를 펴고 맞설 수 있도록 용기를 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극 초반 안나는 상상 속 연인을 '올빼미'라 부르며 노래하는데, 여러 옥타브를 자연스레 넘나드는 멜로디와 새의 날갯짓을 닮은 안나의 몸짓이 아름답다. 가창력과 연기력 다 갖춘 두 배우라 더 빛나는 장면. 아이비와 유리아는 "이선영 작곡가의 노래가 듣기는 좋은데 부르는 사람은 부들부들 떨릴 만큼 어렵다"며 웃었다. "배에 늘 힘을 줘야 음이 안 떨어지니까 숨도 차고 긴장도 백배예요. 처음에 작곡가 만나서 '변태 아니냐, 어떻게 이런 멜로디를 쓰느냐'며 농담했다니까요."
이 뮤지컬에 젊은 여성 관객이 열광하는 건, 단순한 남성 중심 사회의 피해자 여성 이야기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뮤지컬은 '내가 나라는 게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을 꿈꾸고, 극 중 안나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들과 함께 당당히 역경을 이겨낸다.
유리아는 "안나는 모든 걸 단칼에 해결하는 수퍼 영웅이 아니라 약하고 상처받지만 결국 자기 두 발로 서야 하는 우리 모두의 분신"이라고 했다. "세상이 '그게 아니다'고 하면 신념과 확신이 흔들릴 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결국 자신을 믿어주는 한두 명만 있다면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요."
아이비는 "안나도 사실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뭘 잘할 수 있는지 확신이 없던 여성"이라고 했다. "안나는 누군가 '이 세상 모든 것엔 이유와 장점이 있다'고 말해주자 용기를 얻어요. 아직 자신의 꿈을 찾지 못한 이 세상 모든 안나가 저희 뮤지컬에서 그런 용기를 얻어 가길 바랍니다."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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