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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1만 개 선이 빚어낸 '色의 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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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빛이 메아리치다' 展

투명 레진·물감 사용한 작품 46점

"사람들이 그림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작품에 다가가는 모습을 볼 때가 제일 좋아요. 나이 지긋한 남자 관람객이 안경을 들어 올리고 목을 길게 뺀 채 내 그림을 들여다봤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생각하지요."

조선일보

동화‘핑크대왕 퍼시’에서 영감을 얻은‘퍼시 더 컬러’시리즈 앞에 선 김현식. 작품의 테두리를 안경테처럼 보이도록 어둡게 처리했다. /박상훈 기자


지난 13일 서울 삼청동 학고재 갤러리에서 만난 김현식(53)은 "어깨랑 팔꿈치가 너무 아파서 병원에 다닌다"면서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매만졌다. 개인전 '빛이 메아리치다'를 준비한 과정을 들어보니 그럴 만했다.

일단 투명한 레진(resin·에폭시 수지)을 판에 바르고 말린다. 두 손을 모두 사용해 송곳으로 선을 긋는다. 그 위에 물감을 칠한 뒤 한 번 닦으면 송곳으로 긁은 홈에만 물감이 남는다. 붓고, 긁고, 칠하는 이 작업을 7~10번 반복하면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한 달쯤 걸린다. 김현식은 "투명한 캔버스를 열 겹 쌓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작품 하나에 적게는 5000개, 많게는 1만 개의 선을 긋는다. 이 같은 방식으로 제작한 작품 46점을 선보인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김현식은 "뭘 해도 남들이 했던 것이나 남들이 하고 있는 것"이라는 회의가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회화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평면에서 입체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고 했다. 빨갛고 파란 선(線)이 모이고 겹쳐서 빨갛고 파란 면(面)이 된다. 같은 색이 칠해진 평면 같지만, 그림과 두세 발짝만 거리를 두고 보면 어느 한구석도 같은 빨강이나 파랑인 데가 없다. 여러 겹으로 겹친 선마다 파인 깊이가 달라서 같은 물감이어도 색이 달라 보이고, 색이 보여주는 깊이가 착시에 가까운 입체감을 만들어낸다. 10초 이상 쳐다보고 있으면, 평면이 요동을 치는 것 같기도 하고 튀어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빛이 메아리치다'란 전시 문패는 평론가 홍가이가 김현식 작품을 가리켜 "빛 알갱이들이 작품으로 들어갔다가 색선에 닿아 반사되는 모습을 광자(光子)의 율동이라고 봐도 좋겠다"고 한 데서 붙여졌다. '퍼시 더 컬러' 시리즈는 김현식의 아이가 어렸을 때 읽었던 영국 동화 '핑크대왕 퍼시'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작품이다. 핑크를 너무 좋아해서 온 세상을 핑크색으로 바꾸려던 왕을 위해 신하들이 핑크색 렌즈의 안경을 만들어 줬다는 이야기. "새로운 색상의 안경, 새로운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달리 바라보자"는 제안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빨강, 노랑, 초록, 파랑, 주황, 보라 등 6개 색으로 이뤄진 '퍼시' 연작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많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관객을 작품 앞에 다가오게 하는 것이죠. 제가 그어놓은 선을 들여다보면서 그 사이에 있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게 관객의 몫입니다." 3월 4일까지. (02)720-1524



[변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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