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맞은 김형석 명예교수
‘남아있는 시간을 위하여’ 펴내
고독과 인연, 이별, 소유, 노쇠, 죽음 등에 관한 철학이 담긴 산문을 모아 ‘남아있는 시간을 위하여’를 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동아일보DB |
“환갑 때는 새 출발을 한다고 생각했소. 아흔 살을 넘기니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고) 오래 산다는 것도 참 힘든 일이라고 느꼈지요. 노인의 장수 역시 우리 사회가 다 같이 고민하고, 올바른 길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과 대면한 노(老)철학자의 진솔하고 담담한 문장이 수필 문학의 진경을 보여준다. 올해 한국 나이로 백수(白壽·아흔아홉 살)를 맞은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98)의 산문집 ‘남아있는 시간을 위하여’(김영사·사진) 얘기다.
김 교수는 18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50여 년간 쓴 수필 중에서 독자들에게 의미를 줄 수 있는 글만 엄선해 담았다”며 “독자들이 인생의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 책에는 김 교수의 산문 25편이 담겼다. 표제작은 새로 썼고, 나머지는 에세이스트로 널리 사랑받아온 저자가 ‘영원과 사랑의 대화’(1961년) 뒤에 쓴 글 가운데 골라 모았다.
많은 후학을 길러내고 1960년대부터 ‘고독이라는 병’을 비롯해 기록적인 베스트셀러를 내며 삶의 지침을 전파했던 김 교수는 어느덧 스스로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깨닫는다. 어느 날 오후 그는 산책길에 서산 너머로 장엄하게 저무는 해를 바라봤다. ‘해가 지는 데 몇 분이 걸릴까. 내 나이도 저 태양과 같은 순간에 이르고 있는데 몇 해나 남아 있을까. 몇 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주어져 있을까. 그 시간 동안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김 교수는 이에 대해 “지금도 언제나 어떻게 인간관계를 선하고 아름답게 이끌어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며 “그것이 도덕과 윤리의 기본이다. 모두가 무엇을 위해 살지 고민하고, 그것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함께 가져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김 교수는 ‘또 하나의 나’와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고독에 관하여’). ‘나’는 친구가 죽었을 때,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랑하던 사람이 운명했을 때 자신의 행동을 살피고 무언가를 묻고 싶어 하던 표정을 그대로 가지고 나타났다. 저자는 영원, 죽음, 무한, 허무, 운명 같은 주제를 두고 스스로와 대화한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그는 ‘신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자 귀를 기울였다.
장수하는 건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일이기도 했다. 김 교수는 노모를 모시는 동시에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하는 아내의 병 수발을 하며 10여 년을 살았다. 그동안 ‘어깨에 쌀가마니 두 포대를 지고 가는 것같이 힘들었다’. 그러나 7년 사이 모친과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외로움과 서글픔이 온몸을 덮쳐왔다.
‘사랑을 주고받을 삶의 앞길이 없어진 것이다. 두 분의 사랑을 영원히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 그러나 내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생각이 한 가닥 피어올랐다. 이제부터 두 분에게서 받은 사랑을 더 많은 사랑해야 할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야겠다.’
김 교수는 고고한 현자의 높이에서 내려다보지 않는다. 그 자신도 ‘백수를 맞이하는 오늘까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온 셈’이라고 고백한다. 그 열정은 인생의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간절해진다. 김 교수도 “나이가 들었기에 민족과 국가, 사회를 걱정하는 마음은 더욱 커져간다”고 말했다. 노화와 죽음이 주요한 화두로 부각된 오늘날 서가에 꽂아두고 곱씹으며 벗으로 삼을 만한 책이다. 표제작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그래도 나를 위한 시간들이 아직은 남아 있다.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와 ‘힘드시지요?’라고 물으면 나는 ‘예,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합니다’라고 대답할 것 같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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