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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양승태 사법 농단]재판 돕는 기구 법원행정처, 대법원장 비서 역할하며 ‘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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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장·대법관 ‘출세 코스’…인사권자 눈에 들려 충성

“양승태 때 행정처 사람들, 겁이 없었다”…개혁 불가피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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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위에서 판사의 동향을 파악하고 청와대와 판결의 결론을 거래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전위부대는 법원행정처였다. 대법원 판사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위원회가 22일 발표한 보고서에는 재판을 돕는 기구여야 할 행정처가 어떻게 판사들을 감시하고 죄어왔는지 드러나 있다. 판사들은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일주일은 멍한 상태일 것 같다”며 허탈해했다.

행정처는 이른바 엘리트 판사 37명이 모인 곳이다. 전국의 판사가 2900여명이니 1.5%에도 못 미친다. 재판사무를 돕는 사법행정기구인데 자타가 공인하는 출세 코스다. 다른 판사들에게는 외부와의 접촉을 자제하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정치인, 관료, 언론인들을 수시로 접촉한다. 넘버원인 처장은 대법관 가운데 한 사람이 맡는데, 대법원장 후보 1순위다. 넘버 투인 차장은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대법관 1순위다.

판사들이 재판을 하지 않는 행정처 근무를 선망하는 이유는 인사권을 가진 대법원장의 눈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행정처 출신 판사 100%가 법원장·대법관으로 가는 길목인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하고 있다. 일선 판사 가운데 15% 남짓만 고법 부장판사로 승진하는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다. 지난해 경향신문이 이용훈·양승태 대법원장 시절(2005년 9월~2017년 9월) 행정처에서 근무한 전·현직 판사 456명(연인원)을 전수조사한 결과다.



경향신문



행정처는 사법행정기구를 표방하지만 사실상 대법원장의 비서조직이다. 행정처 판사들은 판결문 대신 보고서를 쓰는데, 차장, 처장, 대법원장의 눈에 들려고 밤을 새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다른 사람보다 더 자세한 보고를 하겠다는 욕심에 동료 판사들의 사생활까지 캐고 다닌 것 아니겠느냐”고 한 판사는 말했다. 이들의 보고서 내용은 양 전 대법원장이 추진한 상고법원 등 법원사업에 반대하는 판사들을 제압하는 데 집중됐다.

행정처 판사들은 자신들의 불법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대법관 1순위인 행정처 차장, 대법원장 1순위인 행정처 처장을 위해 끊임없이 보고서를 생산했다. 지난해 3월에는 불법 행위가 언론보도로 드러나자 증거를 없애기도 했다. 이모 판사에게 블랙리스트 관리를 지시한 이모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문건 2개만 제출하고 마무리하는 대책을 세웠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양 전 대법원장 시절 행정처가 앞서 대법원장 시절보다 심각한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갈린다. 지난 대법원장 시절 행정처에 근무한 판사들은 “이전에 이런 일이 없었다. 내가 모르게 있었다 해도 이 정도는 결코 아니다. 양 전 대법원장 시절 행정처 사람들이 겁이 없었다”고 했다. 이유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만 되지 않았다면 임기 말에 대법원장을 임명키로 예정돼 있던 정치 일정을 꼽는다.

반면 정도의 차이만 있지 제왕적 대법원장의 비서기관이라는 성격 아래서는 비슷한 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있다. 지난해 판사 블랙리스트 논란이 한창이던 당시 “제왕적 대법원장 권한과 행정처 중심의 관료적 승진구조로 인한 법관 사회 관료화는 이용훈 전 대법원장 시절에 더 심화됐다”며 “우리법연구회 출신을 포함한 소장 법관들이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행정처 요직에 기용되거나 기타 권력의 주류에 편입되면서다”라는 주장이 판사들 사이에서 나왔다.

행정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근무자를 판사에서 변호사로 바꾸고, 대법원장의 인사권한을 축소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과 유럽의 경우 변호사 자격을 가진 사법행정 전문가들이 이 업무를 한다. 또 판사가 2년에 한 번씩 인사 대상이 되는 것도 일본을 제외하면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대법원장이 인사권을 쥐고 판사들을 비서로 부리면서 불법이 시작되고 재판까지 간섭하는 오늘날의 타락이 시작됐다”고 법조계 관계자는 지적했다.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seirot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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