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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정권 바뀔 때마다 국책연구원장 물갈이 … 임기제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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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I·산업연 등 연이어 자진 사임

27곳 중 9명이 임기 남기고 나가

“정부와 국책연구기관은 한 몸”

“연구기관 독립 보장해야” 반론도

유병규 산업연구원장이 17일 사임 의사를 밝혔다. 임기를 1년 4개월이나 남긴 시점이다. 이에 따라 산업연구원은 19일 유 원장의 퇴임식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는 “연말 연초에 계획된 연구원의 대내외 사업을 마무리했다”며 “연구원이 새로운 분위기에서 더욱 발전하기를 원한다”며 사임의 변을 밝혔다. 스스로 물러나는 형태를 취했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중앙일보

국책연구기관장 줄줄이 사퇴


유 원장은 1988년 현대경제연구원에 입사해 동향분석실장과 경제연구본부장 등을 거친 학자다. 그는 2013년 박근혜 정부 때 대통령 직속 헌법기구로 승격한 국민경제자문회의의 초대 단장(1급)을 맡았고, 이를 발판으로 2016년 민간 연구소 출신 중 최초로 산업연구원장에 임명됐다. 산업연구원 고위 관계자는 “지난해 5월 새 정부 출범 이후 유무형의 사퇴 압력을 여러 차례 받았던 거로 안다”고 말했다. 유 원장 자신도 지난해 말부터 측근에게 사임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다고 한다.

유 원장만이 아니다. 지난 연말부터 국책연구기관장들이 줄사표를 내놓고 있다. 모두 지난 정부에서 임명된 인사다. 지난해 11월 김재춘 전 한국교육개발원장이 사의를 밝혔다. 박근혜 정부에서 교육 분야 실세로 불렸던 그다. 영남대 교육학과 교수를 지낸 김 전 원장은 박 전 대통령 대선 캠프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정권 출범 이후엔 2013년 3월부터 청와대 교육비서관에 발탁됐고, 이후 교육부 차관으로 일하다 2016년 교육개발원장으로 옮겼다.

나흘 뒤엔 김준영 전 경제·인문사회연구회(경인사연) 이사장이 사임했다. 임기가 약 2년이나 남은 상황이었다. “국책연구기관이 각자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어 경인사연의 연구 총괄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며 의욕을 보였던 터라 돌연 사임으로 볼 만한 상황이었다. 성균관대 총장 출신인 김 전 이사장은 정치색이 비교적 옅은 경제학자다. 그런데도 그가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건 이사장의 힘이 워낙 막강해서다. 국책연구기관의 정식 명칭은 정부출연연구기관이다. ‘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설립·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에 그 근거가 있다. 이에 따라 26개의 연구기관이 설치돼 있고, 경인사연이 이들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구조다. 기관장의 임면권을 이사장이 행사하고, 각 기관의 연구 방향도 총괄한다. 익명을 원한 한 교수는 “산하 연구기관장을 물갈이하려면 이사장부터 코드가 맞는 인물로 바꿔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김 전 이사장이 물러난 이후 국책연구기관장의 사임 행렬은 더욱 빨라졌다. 12월 26일 김준경 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이 임기를 1년 넘게 남기고 사임했다. 김 원장은 이날 오전 내부 게시판에 퇴임 의사를 밝힌 뒤 오후에 곧바로 이임식을 갖고 연구원을 떠났다. KDI 부원장 출신인 그는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재정경제2비서관을 역임했다. 2013년 6월 원장이 돼 2016년 연임에 성공했다.

이틀 뒤엔 현정택 전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이 물러났다. 역시 임기를 1년 반 정도 남긴 상황이었다. 재정경제원 대외경제국장 출신인 현 원장은 박근혜 정부에서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과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을 지냈다. 1월엔 손기웅 통일연구원장이 자리를 내놨다. 앞선 8월엔 고용노동부 장관 출신인 방하남 전 한국노동연구원장이 떠났다. 당초 임기는 2018년 6월 7일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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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책연구기관장 줄줄이 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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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난 5월 새 정부 출범 이후 경인사연을 포함해 27개 기관 중 3분의 1인 9명이 임기를 채우지 않고 스스로 떠났다. 끝이 아니다. 곧 새 경인사연 이사장이 취임한다. 국무조정실은 최근 이사장추천위원회를 열고 3명의 후보를 압축했다. 성경륭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김수진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소진광 가천대 행정학과 교수다. 성 교수가 가장 유력하다. 참여정부 마지막 정책실장 출신인 그는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싱크탱크 역할을 했던 ‘정책공간 국민성장’의 모태인 심천회의 멤버다. 새 이사장은 국무총리가 임명한다. 이달 내로 결론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임면권을 가진 이사장이 바뀌면 정리 작업이 더욱 가속할 것이란 분석이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에너지경제연구원장 등이 교체설이 나온다.

국책연구기관장의 연이은 자신 사퇴를 두고 정권 교체에 따른 자연스러운 수순이란 시선과 권력 줄 세우기란 비판이 교차한다. 익명을 원한 KDI 연구원은 “말 그대로 정부가 출연한 연구기관인데 정권 교체로 정책 방향이 달라졌으면 그에 따르는 게 맞다”며 “새 정부가 소득주도성장을 말하는데 국책연구기관이 덮어놓고 틀렸다고 말할 순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국책연구기관이 정부와 호흡을 맞춰야 하는 것 아니냐는 현실론이다.

수장 임면권을 쥐고 연구기관의 독립성을 훼손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또 다른 연구원은 “국책연구기관의 연구 결과는 국가의 미래와 직결된 문제이고, 연구는 철저히 학자의 양심과 학술적 판단으로 행하는 것”이라며 “우리가 특정 정책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생산해내는 곳은 아니지 않으냐”고 말했다. 임기를 남기고 물러난 경험이 있는 한 공공기관장은 “윗선에서 직접 사퇴 압박을 받은 적은 없지만, 주변에서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 섞인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다”며 “사회 전반적으로 정권이 바뀌면 기관장도 바뀐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게 진짜 문제”라고 지적했다.

임기제 무용론도 커지고 있다. 지키지 못할 거면 아예 없애라는 지적이다. 문명재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직책이나 기관의 성격 별로 임기제가 필요한지 교통정리부터 하자”며 “제대로 따져보고 한 배를 타야 하는 자리라면 임기를 아예 없애고, 독립성이 필요한 자리라면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게 맞다”고 말했다.

세종=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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