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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정끝별의 시 읽기 一笑一老] 너와집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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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집 한 채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김명인(1946∼ )
("물 건너는 사람", 세계사, 1992)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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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을 숨차게 달려왔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홀연 길을 잃고 세상과 두절되고 싶어진다.

열두 고개 넘어 맹수와 금강소나무와 산양이 산다는 경상북도 최북단 울진군 북면 두천리쯤의 태백 숲길이었으면 좋겠다.

무릎이 꺾인 채 길과 시간과 세간의 슬픔을 비껴 너와집 한 채처럼 주저앉고 싶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마침내 돌아가는 길마저 지우고 싶다.

첩첩의 농담으로 둘러싸인 능선 뒤편으로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지도에도 없는 '강원남도 두천'이라는 곳, 누군들 한 번은 꿈꿔보지 않았을까.





[정끝별 시인·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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