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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여행 판도라] 남은 엔화 쓰고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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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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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간사이국제공항 23번 게이트 앞.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기까지 10분 남짓 남았다. 아쉬운 마음에 시곗바늘과 공항 내부를 번갈아 쳐다보던 중 벽 쪽에 위치한 한글 문구 하나에 시선이 멈췄다. '쓰고 남은 동전을 장난감으로.' 가까이 가서 보니 우리말 말고도 총 7개국 언어가 장난감 기계를 설명하고 있다.

일본말로 동전 소리를 뜻하는 '가챠(GACHA)'. 동전을 넣고 핸들을 돌리면 장난감이 나오는 '랜덤 박스' 기계다. 1990년대 우리나라 초등학교 앞을 주름잡았던 그 '뽑기' 기계 맞다. 총 16개의 가챠 안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기념품은 물론이고 동서양을 막론한 다양한 캐릭터 상품이 들어 있다. 1회에 200엔이다(약 2000원).

몇 분 후면 일본 땅을 떠날 보딩 직전의 여행자들이 가챠 앞에 멈춰 서성인다.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리고 주저 없이 동전을 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참을 고민하다 발길을 돌리는 사람도 있다. 필자는 후자였다. 어쩐지 이 기계가 "잠깐만요. 엔화 한 푼이라도 더 쓰고 가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 입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섰다.

하지만 일본의 마케팅 능력에는 내심 감탄했다. 왜 게이트 앞일까. 해당 가챠의 명목은 '동전을 환전하지 못한 여행자를 위한 배려'다. 외국 동전을 다시 한화로 환전하려면 50% 이상의 수수료가 붙는다. 따라서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절반 이상을 손해 보는 환전보다는 모금함에 기부하거나 그대로 가져가는 것을 택한다. 이처럼 선택지가 단 2개뿐이었던 여행자들에게 '손가락 크기 장난감'은 꽤나 매력적이다. 작고 가벼워 부담 없을 뿐 아니라 애물단지 동전을 사용해 막바지 추억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현지 언론에 따르면 공항 가챠는 지난해 7월 한 문구 업체 아이디어로 나리타 국제공항에 처음 등장했다. 현재는 모든 공항에 각각 약 50~200대씩 설치된 상태이며 판매량은 전국 일반 가챠 평균 매출 대비 3~5배다. '여행자를 위한 배려'라는 명목 아래 이들은 티끌 모아 태산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외국인 여행객이 그대로 들고 가는 한국 동전에 대해 모금함 말고는 별다른 방책이 없다. 우리도 우리만의 신선한 아이디어를 고민해볼 때다. 곧 떠나려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점에서도, 한화 동전을 한 푼이라도 더 모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다. 한국 하면 정(情)이다. 동전 한 닢에 정을 나누는 콘셉트는 어떨까. 자칫 "엔화 쓰고 가세요"라고 들릴 수 있는 가챠와는 확실히 다른 접근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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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 여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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