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7.08 (월)

32곳 기관장 사표 받아놓곤, 논공행상 덜 돼 무더기 공석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지방에 본사가 있는 한 공공기관은 연말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내년 사업 계획과 인력 충원 계획을 짜지 못하고 있다. 몇 달째 기관장 자리가 비어 있어 의사 결정을 내릴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한 임원이 기관장 대행을 맡고 있지만, 새 기관장이 오면 어차피 모두 다시 결정할 일이라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또 일부 공공기관의 경우 새 정부 코드에 맞지 않는 인사라는 이유로, 임기가 많이 남은 기관장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밀려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요즘 공공기관 직원들의 관심은 온통 기관장 인사에 쏠려 있다. '사장으로 A가 오면 누가 덕을 보고 누가 좌천될 것이다' 'B가 오면 특정 집단 출신이 중용될 것이다' 같은 전망에 관심을 쏟느라 업무는 뒷전이고, 줄 대기에 바쁜 형국이다. 나랏돈을 굴리는 한 공공투자기관에선 경력 직원들의 퇴사가 줄을 잇고 있다. 사장 공백이 길어지면서 업무 기강이 해이해졌고, 분위기에 실망한 직원들이 처우가 더 좋은 민간 기업으로 이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관장 공백 상태로 인한 공공기관 복지부동의 피해는 결국 거래처와 공공 서비스를 받는 시민들이 입는다.

◇기관장 쫓아내곤 후임자 인선 '뭉기적'

10일 추경호 자유한국당 의원실에 따르면 현 정부 들어 '의원면직' 처리된 공공기관장은 32명에 이른다. 임기가 남아 있지만, 전 정권과 관계 있는 것으로 의심돼 정부가 종용해 자리를 떠난 사람이 대부분이다. 의원면직된 32명 중 한 명인 A씨는 "어느 날 사무실로 정보기관 관계자가 찾아와 '요즘 별일 없느냐'고 묻더라. 그래서 '무슨 뜻인 줄 알겠다'고 답한 뒤 곧 사표를 냈다"고 말했다. 다른 B씨는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아 채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했다. 전 정권에서 임명한 공공기관장을 이런 식으로 밀어내 버리고는 새 인사로 채우지 않은 채 계속 뜸만 들이는 경우가 다반사다. 현재 기관장 공석인 60곳의 평균 공석 일수는 123일에 이른다. 해당 공공기관은 업무 공백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한 공공기관 경영기획실 관계자는 "섣불리 일을 벌이고 신년 계획을 수립했다가 새 기관장이 오면 질책을 당할 수 있다"며 "최소한의 업무로 버티고 있다"고 했다.

조선비즈


공공기관의 대국민 서비스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만 커지고 있다. 추경호 의원실 관계자는 "기관 내부 기강이 해이해지고, 업무 처리가 지연되는 기관이 늘고 있다"며 "각종 결재와 의사 결정 지연으로 업무 차질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공공기관장 전리품 관행 언제까지?

전문성 있는 인사를 찾느라 시간이 걸린다면 다행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추경호 의원실에 따르면 현 정부 들어 임명된 30명의 공공기관장 가운데 이미 23명이 캠코더(문재인 대선 캠프, 코드 맞는 인사, 더불어민주당 출신 인사들을 지칭) 인사로 의심된다. 9명이 캠프 출신, 14명이 코드 인사라는 게 추 의원실 분석이다. 임명 과정에서 논란이 컸던 김성주(더불어민주당 호남특보 출신)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이강래(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출신) 한국도로공사 사장 등이 대표적이다. 공공기관 한 관계자는 "전 정권 보은 인사가 떠난 자리에 현 정권 캠코더가 오고 있다"고 평했다.

정부 일각에선 캠코더 인사 배치에 시간이 걸리면서, 기관장 인사가 늦어지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정부 한 관계자는 "정권 출범 공헌도를 따져 자리를 배치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며 "인수위원회에서 이런 일을 해야 하는데, 이번 정권이 인수위 없이 급하게 출범하느라 다른 정권보다 상대적으로 오래 걸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책연구원 한 관계자는 "전문성 없는 낙하산 인사를 내려 보내는 관행이 이번 정권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며 "이럴 바엔 차라리 낙하산 전용 자리를 지정해 놓고, 나머지 기관들은 철저히 전문성 있는 사람을 뽑는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박유연 기자(pyy@chosun.com)

<저작권자 ⓒ ChosunBiz.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