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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6 (화)

최고급 식당서 "밥값 내겠다"…정의선 전화 받은 정재승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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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의 ‘T’와 기아의 ‘K’…정의선을 읽는 코드



■ 경제+

신차는 나오는 족족 부진을 면치 못했다.

1998년 현대자동차에 인수된 직후 기아자동차(현 기아) 이야기다.

피지배 기업 이미지가 굳어지면서 더욱 그랬다.

2000년대 초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당시 기획총괄부본부장)은 기아의 상황을 “패배주의, 그리고 정신력 부재”라고 진단했다. 직원들의 마음이 다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2005년 기아 사장이 된 그는 이 같은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하는 것, 도약을 위한 필수 마음가짐이었다. 정 회장은 ‘경영자 정의선’으로 거듭나기 위한 승부수를 기아에 걸었다.

기아의 변신 과정을 살펴본다.



1. “세단 이름에 뇌과학 활용” 정재승 교수에 불쑥 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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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기아가 만들던 리오·포르테·로체·오피러스로는 변화를 만들기 어려웠다. 중국 공장에선 나온 지 10년 넘은 프라이드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성능·디자인·이미지 모두 바꿔야 했다. 하지만 기아의 이미지를 바꾸는 과정에서 ‘어떻게’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고전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과학과 데이터였다.

정 회장은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에게 전화했다. 정 교수가 하고 있던 ‘뉴로 마케팅’을 신차 작명에 적용하겠다고 제안했다. 사람이 의사결정 할 때 일어나는 뇌신경과학적 변화를 활용하는 마케팅 방식이다. 조건은 없었다. 정 회장은 “소비자가 가장 사고 싶어 할 만한 차 이름을 뇌 과학의 힘으로 찾아달라”면서 “원하는 방향이나 선입견은 없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차준홍 기자


정 교수팀은 알파벳 한 글자와 숫자를 붙여 차 이름을 만드는 트렌드를 확인했다. 나이·소득·학력·성별·국적 등을 구분한 잠재적 소비자군을 정해 머리에 뇌파 측정 장치를 붙였다. 자동차 이름과 관련 있는 실험이라는 걸 알려주고 참가자에게 순차적으로 알파벳을 보여주면 뇌파가 반응한다. 즉각적인 뇌신경과학적 변화를 측정해 보는 건 이례적인 도전이었다. 참가자들 뇌파의 우호적 반응은 압도적으로 ‘알파벳 T’에 몰렸다. “T에서 테크놀로지의 현대적 이미지와 세련됨이 느껴졌다”는 반응이었다. 일차적으로 정해진 새 준대형 세단 이름은 T7이었다. 정 회장은 즉각 T 시리즈 추진을 지시했다.

하지만 법무팀 의견서가 제동을 걸었다. “중국 사업자가 차량 관련 상표권 등록을 해놓은 게 있어서 신차에 T를 쓰면 분쟁이 생길 우려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차선책은 ‘알파벳 K’였다. 한국차(Korea)·기아(KIA)·K 시리즈, K가 세 번 반복돼 백인 우월주의 집단 ‘KKK’를 연상시키는 것 아니냐라는 우려가 나왔다. 기아 영문명(KIA)이 미국에선 전사(Killed in Action)의 뜻도 있는데, K가 한 번 더 추가되면 부정적 이미지가 강해질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고심 끝에 정 회장이 내린 결론은 “그래도 K”였다. 과학으로 브랜드 이미지를 바꿔 보자고 한 첫 결정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중앙일보

박경민 기자


결과는 ‘대박’이었다. 2009년 K7을 출시하며 ‘고급스러움’과 ‘품격’을 디자인 핵심 콘셉트로 내세우자 시장은 반응했다. 둥글둥글하고 친숙한 기존 디자인 대신 단순하고 직선적인 디자인이 강조됐다. K7은 2010년 연간 4만2446대가 팔려 준대형 판매량 1위에 올랐다. 2위 현대차 그랜저 판매량(3만2893대)을 훌쩍 뛰어넘었다. ‘형님’ 그늘에 가렸던 기아에 새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새 이름만으로 소비자 선택을 받은 건 아니다. 2006년 폭스바겐 출신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해 디자인총괄(CDO)을 맡겨 기아의 정체성이 담긴 디자인을 찾아냈다. 디자이너에 대한 평판이 차량 디자인 자체에 대한 인식을 좋게 바꿀 수도 있다.

정 회장은 이 점도 활용했다. 호랑이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차량 앞면 ‘타이거 노즈 그릴’ 패밀리룩을 소개하며 철저히 슈라이어를 내세웠다. 타이거 노즈 그릴은 현재 기아 디자인의 트레이드 마크로 평가받는다. 새로운 차량 모델마다 디자인 특색을 차별화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던 과거의 기아와 달라졌다.



2. 중국 이슈에 ‘T’ 막히자 ‘K 시리즈’로 바꿔 대박



이형근 전 기아 부회장은 “사람들은 그냥 훌륭한 디자이너를 데려와 차 디자인만 새롭게 바꾸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을 수 있다”면서 “하지만 정 회장의 뜻은 단순히 차 디자인만을 바꾸는 게 아니라 ‘회사의 모든 경영을 새롭게 디자인하라’는 개념이었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정근영 디자이너


품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디자인도, 이미지도 소용이 없다. 그래서 차체 강성과 충돌 안전성, 주행보조장치를 내세웠다. 2010년 3월 경기도 화성 주행시험장에서 렉서스 ES350과 공개 성능 비교를 하는 ‘맞장 이벤트’를 열었다. 엔진출력·연비 등 제원을 비교하고 실제 주행을 통해 제로백(0→100㎞)이나 추월가속(60→100㎞) 시간이 모두 ES350을 앞선다는 걸 보여줬다. 기아가 렉서스와 일대일로 겨루는 이벤트를 한 것만으로도 화제가 됐다.

중앙일보

정근영 디자이너


K7(현 K8)의 성공은 K5(2010년)→K9(2012년 5월)→K3(2012년 9월)로 확대돼 기아 대표 라인업이 구성됐다. K 시리즈 성공 경험에 꽂힌 정 회장은 가속페달을 더욱 밟았다. “카니발·스포티지는 스포츠유틸리티(SUV)니까 ‘KV00’로 바꿔보죠.” 제네시스 SUV 모델명이 GV70·GV80인 것처럼, 정 회장은 KV라는 이름을 기아에 적용하고자 했다.



3. 슈라이어 영입도 큰 효과 “기아 부활시킨 건 팀워크”



중앙일보

정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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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들의 고민이 깊어졌다. 기아 세단들이 시장이라는 링에 오를 때마다 쓰러진 건 사실이었지만, SUV만큼은 종전 기아맨들이 실패라 인정하기 어려운, 기아의 대표 상품군이었다. 당시 기아 SUV와 승용 밴(CDV)은 현대차보다 10만~20만대씩 더 많이 팔렸다. 스포티지·쏘렌토·모하비·카니발 덕분이었다.

총대는 이형근 전 부회장이 멨다. “카니발·스포티지는 지금도 잘 팔리고 있습니다. 실적이 좋은데 괜히 이름을 바꾸면 오히려 쌓아둔 인지도가 다 날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정 회장의 답은 간단했다. “그렇겠네요. 알겠습니다.” 참모들의 반대를 반기로 취급하지 않았다. K 시리즈 작명 때처럼 데이터를 판단 근거로 삼았다.

중앙일보

차준홍 기자


기아는 올해 1분기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매출은 10.6% 오른 26조2129억원, 영업이익은 19.2% 증가한 3조4257억원이다. 영업이익률 13.1%는 역대 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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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민 기자


정 회장 본인도 기아 사장을 맡은 경험이 일생일대의 도전이었다고 말한다. 지난해 5월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협회)가 만든 대학생과 경영자 간 간담회 ‘갓생 한 끼’에 참석해 “2005년 회사가 정말 망하기 일보 직전이라 은행에 찾아다니며 돈도 꿔봤고, 여러 가지 많은 경험을 했다”면서 “제일 중요한 건 저 혼자 해서 되는 게 아니고 팀워크이더라”고 했다.

기아는 이제 현대차그룹 내에서 ‘형님’ 현대차를 긴장시키는 존재다. 전기차가 대표적이다. 정 회장은 조직이 빠르고 유연한 기아를 통해 전동화 시대를 대비했다. 기아는 2011년 첫 전기차 레이EV 이후 쏘울EV(2013년)·니로EV(2018년) 등을 빠르게 내놨다. 현대차가 첫 전기차 아이오닉 일렉트릭을 시장에 내놓은 건 한참 뒤인 2016년이다.

■ 현대차 모빌리티 기업 혁신의 중심엔 경영자 정의선이 있습니다. 그는 정주영의 손자, 정몽구의 아들을 넘어 100년 기업을 꿈꿉니다. 더중플에서 현대차의 미래 전략을 보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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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욱·윤성민·고석현 기자 〈isotop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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