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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최보식이 만난 사람] "우리는 늘 乙의 입장이었다… 내 입으로 꼭 말해야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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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탄생 100주년'은 왜 초라하게 끝났나… 좌승희 박정희기념재단이사장]

"기념 음악회에 플래카드 없고 박정희 모형의 포토존도 없어

공연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박정희'는 한 번도 언급 안 돼"

"언론사에 보도자료 보냈지만 행사장에 기자 한 명 안 오고

'가십' 한 줄도 나오지 않아… 이건 100% 담합입니다"

얼마 전 지인(知人)이 전화를 걸어와 개탄과 하소연이 섞인 얘기를 했다.

"지난 1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 음악회'를 갔습니다. 공연장 입구와 로비 어디에도 플래카드가 안 보였습니다. 기념 촬영을 위해 설치해 두는 박정희 모형의 포토존(photo zone)도 없었어요. 출입문에 세워 놓은 안내판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공연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박정희' 이름이 한 번도 언급 안 됐습니다. 기념 공연이면 무대 배경막에 박정희 영상(映像)을 비출 만한데 그것도 없었습니다. 정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건 알겠지만,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은 아무런 인상을 주지 못하고 지나갔다. 기억에 남는 이벤트도 없었다. 기념우표 발행 취소와 동상(銅像) 설립 논란만 뉴스가 됐을 뿐이다. 설령 현 정권과 그 지지 세력의 방해가 있었다 해도 이렇게 지리멸렬하게 끝날 수는 없었다. 좌승희(70) 박정희기념재단 이사장을 만난 것은 이 때문이다. 경제학자인 그는 한국경제연구원장과 경기개발연구원 이사장을 거쳐, 작년 초 기념재단이사장에 지명됐다.

조선일보

좌승희 박정희기념재단이사장은“인터넷 매체에서는‘우리가 박정희 동상을 근처에 숨겨 두고 기습적으로 세우려고 한다’고 보도했다”고 말했다. /고운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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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입으로 꼭 말해야 합니까, 정권이 바뀌었고 사회 분위기가 그렇지 않습니까. 박정희 시대 학술 심포지엄에는 토론자를 섭외하기 어려웠습니다. 다들 안 나오려고 하니까요. 당초 계획된 기념사업을 대폭 축소하고, 대중 행사로는 '시와 음악 그리고 인생을 담은 출판기념회'와 '기념음악회'를 했습니다."

―출판기념회라면 지난 6월 22일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관에서 열렸던 것을 말합니까?

"박정희 대통령의 시, 일기, 그림을 수록한 '남편 두고 혼자 먼저 가는 버릇 어디서 배웠노'와 평설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의 출간을 겸한 기념행사였지요. '박정희' 이름이 들어가면 행사장을 구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용케 대관(貸館) 계약을 했지만, 나중에 중소기업중앙회관 쪽에서 불편한 반응을 보였어요. 그런데 이 행사는 언론에 한 군데도 보도가 안 됐습니다."

―언론 입장에서는 그날 행사가 별로 보도할 만한 게 없었다고 판단했겠지요.

"행사 보도 자료를 모든 언론사에 보냈지만 행사장에는 기자가 한 명도 안 왔습니다. 이건 100% 담합입니다. 의미 있는 내용이 없었다면 '가십'이라도 한 줄 나와야 했지 않습니까."

―박근혜 전 대통령의 여파가 컸을 겁니다. 딸이 아버지의 치적까지 모두 날려버린 격이라고 할까요?

"기념재단에서는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지난 1월부터 회보 대신 격월간 잡지 '박정희 정신'을 발행했습니다. 9000부를 찍어 후원자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6월에 잡지(통권 3호)를 보냈을 때 기업체와 도서관에서 일제히 반송을 해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짜증을 내며 '앞으로 이런 잡지를 보내지 말라'고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그 뒤 잡지 발행 부수를 3000부로 줄였습니다. 매달 후원금도 절반으로 뚝 떨어졌고요."

―지난 7월에는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 취소 통보를 받았지요? 우정본부와 시민단체의 만장일치로 결정된 사업이 뒤집힌 것인데요.

"기념우표는 구미시 생가보존위원회에서 추진했고 기념재단과는 직접 관계된 것은 아닙니다. 현 정부의 개입으로 볼 수밖에 없는 발행 취소 소동을 보면서 씁쓸했습니다."

―박정희 탄생일 나흘 전에 열린 '100주년 기념 음악회'는 어떻게 성사됐습니까?

"연초에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전당에 접촉했으나 '예약이 다 찼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박정희' 이름을 걸고는 어렵다는 말이 비공식적으로 들렸습니다. 그 와중에 지휘자 함신익씨가 해보겠다고 나섰습니다. 그쪽을 통해 롯데콘서트홀을 빌릴 수 있었지요. 계약은 기념재단과 롯데콘서트홀이 했지만, 공연과 관련된 일체를 함신익 측에서 맡아 했지요."

―이를 보고 온 일부 관객들이 "박정희 기념 음악회에 '박정희'가 빠졌더라"고 하더군요.

"기념재단 입장에서는 공연장 입구나 로비에 플래카드를 걸고 포토존 설치를 원했죠. 순수 공연이 아니라 박정희 기념 공연이었으니까요. 물론 너무 요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진을 보니까, 로비에 '안내판' 하나만 세워져 있고 상단 벽 전광판에 행사 안내 글자가 띠처럼 흐르고 있더군요.

"계약 당시 '포토존' 설치는 구두로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공연 사흘 전에 함신익 오케스트라 관계자가 '롯데콘서트홀의 요구로 포토존 설치는 곤란하다'고 알려왔습니다. 그런 걸 고집하면 음악회가 무산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박정희 기념행사를 추진하는 동안 늘 을(乙) 입장이었습니다."

―롯데콘서트홀 측이 공연장 로비에 포토존 설치를 못 하게 했다는 겁니까?

"함신익 오케스트라 관계자가 분명히 그렇게 전달해왔습니다. 요즘 롯데의 어려운 사정을 아니까, 외압을 받아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이해했습니다."

이에 대해 롯데 측은 "외압이라는 게 없었다. 기념음악회인데 플래카드를 내걸고 포토존을 설치할 수 있다. 우리가 막을 이유가 전혀 없다. 이는 공연 주체의 결정 사항이다. 공연 사흘 전 함신익 오케스트라 측에서 '포토 존을 설치하기로 했다가 안 하는 걸로 했다'고 전해왔다"라고 말했다.

함신익 오케스트라 측은 "공연 프로그램북에 '박정희 기념 음악회'라고 나와 있고 관객들도 다 알고 오지 않았나. 우리는 연주료를 받고 연주만 했지 이런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 "포토존은 사전 협의가 없었고 생각하지 못해 설치하지 않았다"며 약간씩 달라지는 입장을 내놓았다.

조선일보

박정희 동상 설립 문제로 충돌. /성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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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김대중 기념 음악회'나 '노무현 기념 음악회'에서 지금처럼 플래카드와 포토존 설치를 못 하게 했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요?

"지금 사회 분위기가 그렇고, 그쪽에서 설치하면 안 된다고 통보해왔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날 음악회는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초청장을 받은 1300여명의 관객이 오셨습니다.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 '황제', 드보르자크의 '신세계로부터' 등 선곡과 연주도 훌륭했습니다."

―순수 공연도 아니고 박정희 기념 공연인데, 기념재단이사장이 '문제가 없었다'고 받아들이니 놀랍습니다. 무대 배경막에 박정희의 영상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공연 내내 '박정희' 이름 한 번 언급이 안 됐다고 하더군요.

"함신익 지휘자가 앙코르를 받고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하기 전에 멘트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뜻깊고 기쁜 날 축하해달라'고만 했어요. '박정희' 이름을 언급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아쉬웠습니다."

―지휘자에게 떠넘기는 것은 무책임합니다. 공연 시작 전 기념재단 측에서 박정희 탄생 100주년 의미를 전하는 인사말을 할 수 있었지 않습니까?

"함신익 오케스트라 쪽에서는 '오프닝 멘트를 하지 않겠느냐'라고 사전에 문의해왔습니다. '박정희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장'인 정홍원 전 총리가 '클래식 공연에는 그런 거 안 한다'라고 잘랐습니다. 총리 지낸 분이 그런 의견을 냈으니, 인사말 없이 곧바로 연주에 들어간 겁니다."

정홍원 전 총리는 작년 초 박정희 100주년 기념사업위원장을 맡았다. 최순실 국정농단 및 대통령 탄핵 전이었다. 그때는 명예로운 자리일 줄 알았지 지금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는 '박정희 동상 기증식'과 '박정희 숭모제'에 불참했다.

―박정희 탄생일 하루 전 서울 상암동 박정희기념도서관 앞에서 동상 설립을 두고 찬반(贊反) 단체 간에 충돌이 있었습니다. 당초 탄생 100주년을 맞아 동상 설립을 계획한 겁니까?

"작년 5월쯤 보수 인사들이 '이승만·박정희…트루먼 대통령 동상건립추진모임'을 만들고 김영원 전 홍익대 교수에게 의뢰해 동상을 제작했습니다. 광화문 광장이나 삼성동 무역회관 등에 세우려고 하다가 여의치 않자, 기념재단에 찾아와 동상을 기증하겠다고 한 겁니다. 박정희기념도서관 경내에 세우는 것은 문제없다 싶어 수락했습니다. 10월 30일 자 신문에 동상 기증식과 제막식이 포함된 '박정희 100주년 행사' 전면광고를 냈습니다."

―어떤 경위로 좌파 단체 사람들이 몰려오는 사태가 벌어진 겁니까?

"한 통신사에서 '서울 광화문에 설립을 추진하려다 논란을 빚었던 동상을 다시 세우려고 한다'고 보도하면서, '적폐 청산을 해야 할 현 시점에 역사적 논란이 큰 인물의 동상을 서울시 소유의 공공 부지에 세우겠다는 것이어서 심히 우려된다. 관련 단체와 설립 반대 운동을 펼치겠다'는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의 말을 집어넣었습니다. 다음 날 서울시에서 '공공 부지에 동상을 세우려면 서울시 심의를 거쳐야 한다는 시(市) 조례가 있다'라는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기념관 안에 동상을 세우려면 서울시의 심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몰랐습니까?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기념재단은 전직 대통령 선양(宣揚) 사업의 일환으로 동상을 세울 수 있습니다. 법률과 조례가 충돌한 셈입니다."

―법과 조례 중에서 법이 상위 개념 아닙니까?

"우리 측 고문 변호사는 '서울시에서 불법으로 세운 것이라고 말하면 논란이 생길 우려가 있다'며 서울시의 심의 절차를 밟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증식만 하겠다'는 보도자료를 냈지만, 인터넷 매체에서 '기념재단에서 박정희 동상을 근처에 숨겨 두고 기습적으로 세우려고 한다'는 식으로 보도했습니다. 좌파 단체가 몰려와 '동상을 세우기 위해 크레인이 들어오는 것을 막겠다'며 기념관 앞에서 텐트 치고 농성을 벌였습니다. 우리는 약속대로 동상의 작은 모형을 배경으로 기증식만 했습니다."

―박정희 탄생일인 14일 구미시 생가에서 '숭모제'가 열렸습니다. '탄생 100주년 행사'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100주년 탄생일인데, 여당 인사나 정부 각료 중에 참석한 이들은 없습니까?

"김관용 경북지사, 남유진 구미시장, 경북 출신의 백승주·장석춘·이철우 자유한국당 의원, 김문수 전 경기지사 등이 참석했습니다. 여당이나 정부 인사는 없습니다."

그 자리에는 홍준표 대표 등 보수 정치인은 물론이고, 박근혜 정권에서 박정희를 팔던 명망가들도 안 보였다.

[최보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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