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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 (목)

동상까지 번진 적폐 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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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김활란·김성수 등 "친일행위" 철거 목소리 커져… 적폐청산 맞물려 갈등 불씨로

"기념관에 세운 것까지 논란… 동상 자체를 역사로 봐야" 지적

여성계몽 이끈 초대총장 동상에… 이대 학생들 '부끄럽다' 팻말

"연대·고대 등도 청산 나서야"

전문가들 "그 자체가 역사… 건전한 역사토론 위해 보존 필요"

조선일보

최근 박정희·김활란·김성수 등 근현대 역사적 인물의 동상을 두고 사회적 논란이 거세다. 친일 행위 등을 문제 삼아 건립에 반대하고 철거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사회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다. '동상 논란'은 식민지 상황에서 근대화를 이루고, 단기간 산업화를 달성해야 했던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이들의 공과(功過)를 함께 평가하지 못해 벌어지는 일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김활란 동상 앞에 '이화는 친일파 김활란의 동상이 부끄럽습니다'라는 팻말이 꽂혀 있다. 이대 학생들로 구성된 '친일 청산 프로젝트 기획단'이 지난 13일 세운 것이다. 팻말에는 '김활란이 여성과 학생들을 전쟁으로 내몰아 일제의 식민통치를 적극 옹호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김활란(1899~1970년)은 이 학교 초대 총장을 지냈다. 일제 강점기 때 좌우 합작 항일단체인 근우회에 참여하고, 문맹 퇴치·여성 계몽 운동을 펼쳤다. 이런 내용은 팻말에 담겨 있지 않다. 이대 측은 기획단에 "(팻말에) 공과를 같이 담자"고 했지만, 학생들은 "취지에 어긋난다"며 거절했다. 기획단은 "다른 학교도 친일 인물의 동상을 기리고 있는데 청산됐으면 좋겠다"고 주장했다.

지난 13일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사진〉' 기증 증서 전달식에는 일부 시민단체가 건립 반대를 주장하며 찬성 측과 충돌했다.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건립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역사 화해' 차원에서 건립을 공약하며 시작한 사업이다.

친일 논란이 있는 인물의 동상 철거 요구는 이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정부의 '적폐 청산'과 맞물리며 거세지는 양상이다. 지난 7월 고려대 총학생회는 본관 앞 인촌 김성수 동상 철거를 요구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된 인물의 동상을 학교에 계속 두고 있는 게 맞는지 재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김성수 선생은 일제 강점기 학교 설립 등 교육·언론 운동을 펼쳤지만, 일제 정책에 협력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조선일보

13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학생들이 교내 김활란 동상 앞에 설치한 팻말. ‘친일파 김활란의 동상이 부끄럽습니다’라고 적혀 있다(왼쪽). 지난 7월엔 서울 고려대 총학생회 등이 성북구 안암동 본교에 설치된 인촌 김성수 동상 앞에서 철거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오종찬·성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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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수난은 이뿐만 아니다.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은 수차례 낙서 테러를 당했다. 2005년엔 시위대가 밧줄로 동상을 끌어내리겠다고 시도한 적도 있다. 김성수 동상은 1989년 총학생회가 밧줄로 끌어내리려 했었다. 2010년엔 파주시가 임진각에 6·25전쟁 영웅인 백선엽 장군 동상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지역 진보 정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일제강점기 간도토벌대 출신의 친일 인사"라며 반대해 무산됐다. 연세대에 있는 백낙준 초대 총장 동상도 '친일 논란'이 일며 학생들이 철거를 주장하기도 했다.

논란이 되는 동상은 광화문광장 등 서울 도심에 있거나 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 동상은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 건립할 계획이고, 김성수 동상은 자신이 인수해 키운 고려대, 김활란 동상은 초대 총장을 지낸 이화여대에 있다. 그럼에도 건립 반대와 철거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동상 논란'은 "근현대사를 당파적 시각에서 보는 경향이 지나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 역사에 대한 통합적인 해석을 공유하고 사회적 합의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다 보니 외국과 비교해 우리나라엔 근현대사 인물의 동상이 드물다. 서울 도심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 등 근대 이전 역사 인물의 동상이 대부분이다. 해외에서는 주요 도심에 근현대 역사 인물의 동상을 흔히 볼 수 있다. 영국 런던 의회 인근에는 1㎞ 남짓한 거리에 넬슨 제독과 윈스턴 처칠 등 20여명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프랑스 파리에도 나폴레옹,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던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동상을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동상을 '역사적 교훈을 얻는 조형물'로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예전에 만든 동상이고 그것이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하나의 역사"라며 "이를 꼭 공과 과의 잣대로 편 가르기 하기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놔두고 해석은 각자 저마다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자유롭고 건전한 역사 토론에 유리하다"고 했다. 윤재운 대구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지금의 역사적 논의가 후세에는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며 "마음에 안 든다고 무조건 그때 시류에 휩쓸려 있는 동상을 없애버리기만 한다면 남아나는 게 없을 것"이라고 했다.

[성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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