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의 호수'로 5년 만의 내한… 마린스키 수석 무용수 김기민
높은 점프·팽이 같은 회전력 장점 "언젠간 나만의 갈라쇼 열고 싶어"
230여 년 역사를 지닌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 무용수 김기민(25)은 '백조의 호수' 속 지그프리트 왕자 그 자체였다. 183㎝의 건장한 체격에 작은 얼굴, 긴 목선과 우아한 손놀림. 지난 10일과 12일 러시아 마린스키 프리모스키 스테이지 발레단(마린스키 발레단의 블라디보스토크 분관 격) '백조의 호수'로 한국을 찾은 그의 몸짓에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은 기립 박수와 열기로 화답했다. 최고등급 R석 28만원이라는 가격이지만, 빈자리는 거의 없었다. 지난해 무용계 '아카데미상'이라는 '브누아 드 라 당스' 남자 무용수 상을 받은 데다 5년 만의 내한. 관심은 뜨거웠다.
최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마린스키 발레단 ‘백조의 호수’ 무대에 선 김기민. 하늘로 솟을 듯한 점프가 눈을 사로잡는다. /서울콘서트매니지먼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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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김기민이 무대에 등장하자 아이돌 팬클럽 같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역시 마린스키 수석 발레리나인 빅토리아 테레시키나와 호흡을 맞춘 1막에선 오데트와 지그프리트의 애절하면서도 젊은 에너지가 넘쳤다. 2막 테레시키나의 경이로운 32회전 이후, 김기민은 솔로로 무대를 지배했다. 중력이 힘을 잃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 높은 점프와 긴 체공 시간, 사뿐한 착지, 용수철 같은 탄성, '인간 팽이' 같은 회전력 등 김기민 특유의 장점이 그대로 드러났다. 까다롭고 별점에 인색하기로 소문난 영국 무용평론가 세라 톰슨이 별 5개 만점을 줬던 바로 그 연기였다.
김기민과 '최연소'라는 수식어는 늘 함께였다. 열다섯에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영재 입학했고, 열아홉이던 2011년 아시아 발레리노 최초로 마린스키발레단에 입단했다. 그런 천재도 슬럼프는 있다. 11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털어놨다. "2년 전 슬럼프가 왔어요. 무얼 위해 이 자리까지 온 걸까. 정체성 혼란이 생기더라고요. 선생님께 '무용 그만두겠다'라고 하소연할 정도니까요. 흔들리니 바로 부상이 오더라고요." 그의 선생 블라디미르 킴은 "너처럼 재능을 부여받은 이들이 겪는 통과의례"라며 그를 다독였다.
방황하던 그가 마음을 다잡은 순간이 있다. 평소 자주 찾던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유리 테미르카노프 지휘로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들을 때였다. "전율이 일었어요. 테미르카노프 선생님이 마치 '난 인생을 이렇게 잘 살아왔다'며 저한테 말을 거는 듯싶었죠. 같은 음악도 그의 손을 거치면 이렇게 다르구나. 무대에서만 박수받는 게 아니라, 극장을 나선 뒤에도 관객의 가슴속에서 숨 쉬는 예술가가 되고 싶어요. 언젠간 제 이름 단 갈라쇼도 보여드릴 수 있다면…."
배운 대로, 주어진 형식으로만 공연을 해오던 과거가 떠올랐다. 이제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는 걸 깨달았고 주변 목소리를 최대한 들으려 노력한다.
"그날 이후 재활에 힘썼어요. 2~3년 걸린다는데, 저는 1년 걸렸어요. '자기 해석력'도 키웠고 '목표'도 생겼어요.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는 걸 무대에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무대는 인생의 결과물. 그만큼 겸손해져야 하고요."
그는 "마린스키 극장 자체가 내겐 교과서"라고 했다. "마린스키를 거친 최고의 무용수겸 안무가. 바츨라프 니진스키, 루돌프 누레예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조지 발란신…. 이분들이 걸었던 출근길을 걷고 옷장을 쓰고, 심지어 전 새옷도 안 맞추고 이분들이 입은 옷을 그대로 물려 입어요. 그들의 혼이 저보고 어떻게 살라고 가르치는 것 같아요." '연습벌레'로도 소문난 그는 "쉬운 행복은 빨리 달아나고 어렵게 얻은 행복이 오래간다고 생각한다"며 "사소하고 귀찮은 것들부터 당장 해버리는 습관 덕에 연습하는 동안에도 눈물 나게 행복하다"고 말했다.
[최보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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