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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무비-181]
-백조의 날갯짓 속 감춰진 어둠
-'세계 최고' 러시아 볼쇼이발레단
-예술과 얽히고설킨 깊은 스캔들 다룬 다큐영화
공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2013년 겨울을 기억할 것이다. 그해 1월 17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사건은 세계 예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세계 최고'의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볼쇼이 발레단에서 충격적인 테러가 발생한 것이다.
2013년 1월 17일 볼쇼이 발레단의 세르게이 필린 예술감독은 공연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괴한으로부터 염산 테러를 당했다. 필린 얼굴에 뿌려진 염산은 세포와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피부를 녹여 버렸다. 이 끔찍한 테러로 필린은 얼굴 전체에 3도 화상을 입었고 실명 위기까지 맞았다.
2011년 볼쇼이 발레단의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필린은 볼쇼이의 수석무용수 출신. 아름다운 외모와 출중한 테크닉으로 구름 같은 팬을 몰고 다니던 스타 발레리노였다. 인기와 실력에 힘입어 무용수에서 감독의 자리로 올라온 필린은 240년 전통의 볼쇼이 극장에 변혁의 바람을 일으켰다. 낭만과 고전 발레 레퍼토리가 주도적이던 볼쇼이에 진취적 모던 발레의 강자인 영국의 현대 안무가 웨인 맥그리거나 프랑스의 크리스토프 마요를 고용하는가 하면, 미국의 발레리노 데이비드 홀버그를 수석무용수로 전격 기용하기도 했다. 전통적 레퍼토리와 테크닉에 강했던 기존의 스타 무용수들은 자연히 캐스팅 경쟁에서 밀려났다. 이에 반발심을 가진 팬들과 관계자들에 의한 해킹 위협이나 협박성 전화를 받기 시작했지만 필린은 개의치 않았다. 이는 1월 17일 테러 사건의 전조였던 셈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볼쇼이 바빌론'은 세계 최초로 월드트레이드센터 사이를 줄타기로 건넌 곡예사 필리페 페티를 다룬 '맨 온 와이어'(2008), 머나먼 이국 땅에서 스타가 된 줄도 모르고 살던 무명 가수의 이야기를 다룬 '서칭 포 슈가맨'(2012) 등 실존 인물의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흡입력 있게 담은 다큐멘터리로 이름난 제작사 레드박스필름의 여덟 번째 작품이다. 충격적일 만큼 흥미로운 사건들을 특정한 사회적 맥락과 역사적 흐름을 그려내는 장치로 사용하는 점이 공통적이다.
국내에서 입소문을 타며 화제를 모은 전작 '서칭 포 슈가맨'을 떠올려 보자. 미국과 멀리 떨어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유일하게 인기를 끌었던 슈가맨의 음악을 소개하며 남아공의 험난했던 현대사를 짚어냈던 것처럼, 이번 영화는 볼쇼이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을 계기로 전통과 개혁 간 끈질긴 갈등을 겪어 나가고 있는 러시아의 자화상을 밀도 있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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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년 역사를 지닌 볼쇼이 극장의 이름은 러시아어로 '큰, 위대한'을 뜻한다. 전속 발레단, 오페라단, 오케스트라와 관련 전문가 3000여 명을 전속 직원으로 거느린 볼쇼이는 이름 그대로 러시아인들의 최고의 자랑거리이자 예술가들에게는 꿈의 무대다. 볼쇼이가 낳은 최고의 발레리나 중 하나인 스베틀라나 자하로바가 '지젤'을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인간 세계를 초월한 몸짓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처럼 완벽에 가까운 예술성으로만 알려져 있던 볼쇼이의 무대 뒤편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알기란 오랜 세월 어려운 일이었다. 옛 소련 시절 '철의 장막' 건너로 보이는 볼쇼이는 그저 아름답고 신비로운 존재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영화 속 등장하는 볼쇼이 관계자들의 공통된 증언은 흥미롭다. "볼쇼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러시아의 작은 표본이다." 러시아가 혼란을 겪으면 볼쇼이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필린의 테러사건 역시 러시아 내의 굳건한 전통을 고수하는 세력과 급진적인 변혁을 추구하는 세력 간에 이어져 온 분열과 암투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사건 이후 수개월간 벌어진 조사 끝에 체포된 범인은 볼쇼이 발레단의 솔리스트 파벨 드미트리첸코였다. 2010년 국립발레단 '라이몬다' 객원 무용수로도 참여했던 그는 볼쇼이 수석무용수를 꿈꾸던 유망한 댄서였다. 그는 자신의 연인이자 볼쇼이 발레단 솔리스트인 안젤리나 보론초바가 필린 체제하에서 번번이 캐스팅에서 밀리는 것에 분노한 것을 계기로 필린에 반감을 갖고 있던 동료들과 일을 벌였다. 이후 볼쇼이의 무용수들은 각각 필린과 드미트리첸코에 동조하는 두 편으로 나뉘어 갈등을 키워갔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백조의 군무 속 숨어 있던 어두운 진실이었던 셈이다.
극적인 사건과 관련된 진술들이 오가는 과정 속에서도 영화는 볼쇼이 발레단의 아름다운 발레 장면들을 틈틈이 선보이며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어둡고 지저분한 현실의 사건들보다도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결국 숭고하리만큼 눈부신 무용수들의 자태다. 볼쇼이에서 수십 년 세월을 보낸 발레단의 산증인 보리스 아키모프는 영화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려운 일이 많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아요. 공연을 잘한 날도 훌륭했던 날도 엉망이었던 날도 볼쇼이는 오로지 전진할 뿐이죠."
[오신혜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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