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의 칼럼 서울대병원 내과 조영민 교수
서울대병원 내과 조영민 교수 |
어릴 때부터 약 봉투에 ‘식후 30분 복용’이라고 적힌 것을 봐 왔다. 약은 그렇게 먹는가 보다 생각했다. 그래도 이게 그리 중요한가 생각하고 그냥 숟가락을 놓자마자 먹어봤다. 무슨 차이가 있는지 느끼지 못했다. 아플 일이 별로 없어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의과대학에서 약리학 수업을 들었고, 음식과 약의 상호 작용에 대해 배웠다. 그러나 누구도 왜 식후 30분에 약을 먹는지 가르치지 않았다.
의과대학을 마치고 수련을 받은 나는 당뇨병을 진료하는 교수가 됐다. 내가 식후 복용이라고 처방하면 약국에서는 으레 식후 30분 복용에 동그라미가 쳐진 약 봉투를 환자에게 건넸다. 서울대병원은 2004년 처방전달시스템(OCS)을 도입했다. 약 처방을 전산화했다. 이때 식후복용약의 기본 용법이 자연스럽게 식후 30분이 됐다. 역시 누구도 근거를 따지지 않았다.
약은 공복에 먹는 약, 식전에 먹는 약, 식후에 먹는 약, 자기 전에 먹는 약으로 크게 나뉜다. 공복에 먹는 약은 위장에 음식이 없는 상태에서 흡수가 잘 되는 약이다. 일부 골다공증 약과 갑상샘 약이 해당한다. 식전에 먹는 약은 음식이 들어가기 전에 미리 위장관으로 들어가 작용을 시작해야 하는 약이다. 탄수화물 분해를 억제하는 당뇨약이 해당한다. 자기 전에 먹는 약은 졸리게 하는 성분이 든 것이 많다.
식후에 먹는 약이 매우 애매한데, 실제로 약의 허가 사항을 보면 식후에 먹으라고 명시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 식사와 함께 복용하라고 적혀 있다. 빈속에는 먹지 말라는 뜻으로 보면 된다. 식사를 개시할 때 먹어도 되고, 식사하는 중간에 먹어도 되고, 숟가락 놓고 나서 먹어도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식후 30분에 복용하라고 한다.
“약을 먹다 보니 하루가 다 간다.” 당뇨를 앓고 있는 환자가 던진 말이다. 식전 30분에 먹는 약, 첫 숟가락 뜨기 전에 먹는 약, 식후 바로 먹는 약, 식후 30분에 먹는 약, 자기 전에 먹는 약 등등. 약의 가짓수도 많은데다 먹는 법이 너무 복잡하다. 잊어버리지 않고 약을 챙겨 먹기도 어렵고, 식전·식후를 가리는 것도 어렵다. 특히 식후 30분에 먹으라고 하니 밥 먹고 나서 잊어버릴까봐 알람이라도 맞춰놓아야 할 지경이다.
어떻게 하면 될까. 불필요한 약은 처방하지 말아야 하고, 약 먹는 법을 복잡하게 해서 괜한 불편을 주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의 약이 식후 30분 복용으로 돼 있는데, 원래 정해진 대로 식사와 함께 먹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식사 직전, 식사 중간, 식사 직후 언제 먹어야 할지 모를 수 있으므로 식사 직후로 통일했으면 한다. 서울대병원은 2013년 당뇨약제에 한해 식후 30분 복용을 모두 식사 직후로 변경한 바 있고, 2017년 9월 27일자로 모든 식후 30분 용법을 식사 직후로 변경했다. 불필요하게 식사 후 30분을 기다리는 관행을 없애자는 것이다. 이 기회에 전국적으로 약 먹는 문화가 바뀌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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