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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일)

메르켈 '수면 유세'하는 동안 약진한 극우정당은 '트럼프식 전략'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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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총선서 3위 파란 일으킨 극우 AfD의 성공 배경은

2012년 지식인들 위주로 유로화 반대 조직 결성이 뿌리

'여자 트럼프'로 불린 당수 뽑고 반 난민 기조로 탈바꿈

선거 앞두고 뽑힌 최고후보, 나치 옹호 발언 쏟아내

주류 언론이 비판할 수록 이목 쏠려 지지율 상승

동성애 반대하면서 여성 동성애자 최고후보로 내세워

SNS 통해 이민자 범죄 중계하며 디지털 선거운동 주도

경제 낙후한 동독 젊은 남성 지지자 많아 양극화도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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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결과가 나오자 환호하고 있는 AfD의 알렉산더 가울란트(왼쪽), 알리체 바이델 공동 최고후보. [AFP=연합뉴스]


“다른 정당에서 우리에 대해 말하는 건 하나도 믿지 마세요. 총선 기표소에 들어가면 아무도 어깨너머로 당신이 누구에게 투표하는지를 보지 못한다는 것만 기억하십시오.”

독일 총선을 며칠 앞두고 베를린 동쪽 프랑크푸르트 오데르에서 유세에 나선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알렉산더 가울란트(76) 공동 최고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독일 집권 연정에 속한 사회민주당 소속 시그마 가브리엘 독일 외무장관이 “우리는 정말 나치를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독일 의회에서 보게 될 것”이라며 AfD의 위험성을 경고한 데 대한 반박이었다.

24일(현지시간) 치러진 총선 결과 AfD는 3위를 차지해 나치 이후 68년 만에 독일 연방 하원에서 주요 세력으로 등장한 첫 극우 정당이 됐다. 가울란트의 주문처럼 선거 전 여론조사보다 더 많이 득표해 미리 본심을 드러내지 않은 ‘샤이(shy) AfD’들이 투표장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2013년 창당한 AfD가 나치 극복에 매진해온 독일의 정치 지형을 변화시킨 배경은 뭘까. 그들의 선거 전략과 독일 사회에 잠재해온 불만과 불안 요소가 상승 작용을 일으킨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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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을 위한 대안 로고


AfD는 2013년 총선을 앞두고 급조되다시피 한 신생정당이다. 실제 뿌리는 2012년 결성된 ‘2013 선거대안'이란 조직이다.

함부르크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인 베른트 뤼케를 비롯해 해세주 국무장관을 역임한 가울란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편집자 출신인 콘라드 아담 등이 이 조직을 꾸렸다. 이들은 앙겔라 메르켈 정부의 남유럽 국가들에 대한 구제 금융과 유로화 사용을 비판하면서 대안을 찾기 위해 모였다.

이들이 선거공약 형태의 선언을 발표하자 경제학자, 언론인, 기업인 등 68명이 동조하는 연대 서명을 했다. 절반 이상이 교수일 정도로 지식인 사회가 호응했다.

AfD 창당대회에서 뤼케 공동당수는 “독일 납세자들이 나치 취급을 당하면서까지 남유럽을 구제해줄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다.

앞서 독일에선 2010년 '유럽의 이슬람화'라는 문제를 제기한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멀어져가는 독일 : 우리는 어떻게 조국을 위험에 빠뜨렸나』라는 책이 발간돼 논란을 일으켰다. 홀로코스트 때문에 인종 문제를 거론하는 게 금기시돼 왔는데, 중앙은행 이사인 틸로 자라친이 담론을 꺼냈다. 무슬림이 독일 사회를 훼손하고 있다는 비난이 담겨 정치권에서 비판이 나왔지만, 책은 불티나게 팔렸다. 유럽을 향해 밀려오는 이슬람 난민과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이 대중 사이에선 이미 깊었다는 증거였다.

자라친은 2013년 『유럽은 유로가 필요 없다』는 책을 냈다. AfD 창당에 이론적 뒷받침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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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독일을 위한 대안의 시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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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D는 그해 총선에서 4.7%를 얻어 의회 의석을 배분받는 5%에 미치지 못했다.

유로화 반대로 시작한 AfD는 2015년 메르켈 총리가 난민 수용 정책을 발표하자 이민 문제에 주목했다. 특히 같은해 7월 당 대회에서 여성 극우 성향 화학자 출신의 프라우케 페트리와 외르크 모이텐을 공동대표로 선출됐다. 페트리는 반 난민 기조를 주요 정책으로 내세우며 당세를 확장했다.

극우 발언을 일삼아 히틀러의 이름 아돌프를 본뜬 ‘아돌피나'나 ‘여자 트럼프'로 불렸다. 초기 창당 멤버 뤼케는 당수 경쟁에서 밀린 뒤 외국인 혐오증에 반대하며 지지세력을 이끌고 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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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AfD는 무슬림 여성들의 온 몸을 가리는 부르카를 금지하자면서 우리는 비키니를 입는다는 포스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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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2016년 100만명이 넘는 이민자가 몰려들면서 AfD의 주장은 먹혀들기 시작했다. 난민 출신자들에 의한 성폭행 범죄 등이 잇따르고 테러까지 빈발하면서 국민들 사이에 거부감이 자랐기 때문이다.

이런 자양분을 바탕으로 AfD는 이번 총선에서 ‘트럼프식 전략'을 구사했다.

자극적이고 논란이 될 만한 이슈와 발언을 쏟아내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게 함으로써 표를 받고 싶은 층에 어필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지난 4월 쾰른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페트리 대표는 AfD가 야당만 할 게 아니라 정부를 이끌 수 있는 정당이 돼야 한다며 중도 강화를 주장하려 했다. 하지만 당의 분위기는 강경 일변도였다. 결국 페트리가 총선을 주도할 수 없다고 선언했고, 그를 대신해 총선을 이끌 공동 총리 후보로 2명이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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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이후 전후 처음으로 독일 하원에 입성한데다 3위를 차지한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공동최고 후보들이 기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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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울란트와 38세의 알리체 바이델이다.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골드만 삭스 등에서 근무한 바이델은 스위스에서 거주하는 동성애자였다. 동성애에 반대해온 AfD가 이를 불식하려 ‘얼굴 마담'을 내세웠다는 평이 나왔다.

가울란트는 독일 정부의 아이단 외초구츠 이민ㆍ난민 특임 장관을 향해 “(터키) 아나톨리아로 추방해야 한다"고 말해 공분을 샀다. 터키 이민자 가정 출신이지만 독일에서 태어난 외초구츠를 비난해 검찰이 혐오금지법을 위반했는지 공식 조사에 착수했다. 당연히 언론의 집중 보도 대상이 됐고, 정치권에서 비판이 나오면 이슈로 이어졌다.

가울란트는 유세 등에서 “영국인들이 처칠을 자랑스러워 할 권리를 가졌다면 우리도 두차례 세계대전에서 독일 군인들이 이룬 성취에 자랑스러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치를 찬양했다는 비난이 나오면 “외무부 장관이 정말로 우리를 나치라고 믿을 정도로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빠져나갔다.

난민 위기가 한창일 때 15%까지 치솟은 AfD의 지지율은 난민 유입 수가 줄고 메르켈 총리가 수습책을 발표하면서 한 자리 수로 떨어졌다. 하지만 총선을 앞두고 극우 성향의 강경 발언이 쏟아졌고 논란이 이어지면서 지지율은 두자리 수로 회복됐다.

바이델 공동 최고후보도 TV 토론회에서 사회자가 부당한 대접을 한다며 중간에 퇴장하는 진풍경을 선보였다.

AfD가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메르켈을 포함한 기성 주류 정당들은 ‘수면 유세'라고 불릴 정도로 소극적인 선거운동을 했다. 대세론을 형성한 메르켈 총리는 TV 토론도 한 차례만 하는 등 이슈가 논의될 장을 만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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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마르틴 슐츠 사민당 대표는 총선 동안 TV토론을 한 차례만 했다. 메르켈 총리가 추가 토론을 거부했다.


마르틴 슐츠 사민당 대표는 총선 후 “메르켈 총리가 부끄러운 선거 캠페인을 이끌었다. AfD의 부상에 그가 상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가 실패한 빈 공간을 AfD가 채웠다”는 것이다. 선거 레이스에서 쟁점이 부각되지 않자 AfD의 인종차별적 발언과 나치 옹호 발언만 논란을 일으키며 주목을 받았다는 의미였다.

AfD는 소셜미디어를 최대 무기로 활용했다. 주류 언론이 비판을 가하자 SNS를 통해 이민자들의 범죄 뉴스를 공유하며 반 이민 정서를 자극했다. AfD의 페이스북 팔로워 숫자는 모든 독일 정당의 페이스북 팔로워보다 많다.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팀이 지난 1~10일 수집한 약 100만 건의 독일 정치 트윗을 분석한 결과, AfD 관련 해시태그가 포함된 게시물이 30% 이상으로 가장 영향력이 컸다.

AfD가 난민 문제에 주력했지만 구 서독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경제수준 때문에 박탈감을 느껴온 동독지역 주민들의 민심도 총선 결과에 힘을 실었다. 양극화를 해결하지 못한 메르켈과 기존 중도좌파 사민당이 불만을 달래주지 못하자 이들은 대안을 줄 수 있는 정당을 갈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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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독일을 위한 대안의 총선 지역별 득표 현황. 구 동독지역에서 지지세가 높다. 동독지역은 상대적으로 이민자가 많지 않은 곳이다. [독일 선거관리위원회,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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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주의회 선거에서 동독 지역에선 기민당과 사민당의 지지율 하락 현상이 이미 포착됐었다. AfD의 주요 지지층은 젊은 남성이 많은데, 이들은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여서 극우 정당에 대한 거부감이 약하기도 했다.

완전 고용에 접근할 정도로 독일의 경제 상황이 좋지만 밀려드는 난민과 무슬림에 대한 대한 공포, 그리고 상대적인 경제적 박탈감은 AfD가 극우정당으로서 강력한 돌풍을 일으킨 원동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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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현지시간) 독일을 위한 대안 소속을 버리고 무소속으로 의원직을 수행하겠다고 발표한 페트리 트라우케 공동대표. [AP=연합뉴스]


총선 결과가 발표된 25일 페트리 대표는 당의 노선에 대한 생각이 달라 AfD 소속이 아닌 무소속 의원으로 활동하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선거에서 약진했음에도 극우정당의 내분이 시작된 것이라 추이가 주목된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유권자들이 현재 집권 연정을 엄하게 심판했다”며 “사회 균열로 이어진다면 AfD는 다음 선거에서도 의석을 꿰찰 수 있다”고 보도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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