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 대부분을 홀로 떠도는 북극곰
절반은 어둠이었고 혼자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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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58도. 북극 서클(북위 66.5도)에는 조금 못 미치지만, ‘오로라 대’(Aurora Oval, 위도 60~80도의 극지방) 바로 밑에 착 붙어있는 이 ‘북극곰 마을’에도 마법의 빛이 찾아온다.
캐나다 중북부의 옐로나이프나 알래스카, 아이슬란드만큼 관광지로 유명하진 않지만, 처칠도 나름 1년 중 300일 이상 오로라가 관측되는 명당이다. 물론 객관적 지표와 달리, 춤추는 오로라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기는 7월 말부터 이듬해 4월 말까지다. 특히 8월과 2~3월에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는데, 여름보다 겨울의 오로라가 더 크고 화려하다. 물론 영하 30도의 환상적인 추위는 덤이다.
가장 크고 화려한 오로라를 볼 수 있는 2~3월의 ‘오로라 시즌’. 오로라가 아주 강할 때 보라색과 흰색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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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라는 즉흥적이고 변덕이 심하다. 맑은 하늘, 대기 가스, 그리고 태양풍의 삼박자가 고루 갖춰져야만 등장하는 이 귀한 몸 앞에선 어떤 계획도 무용지물. 그래서 실시간 오로라 예보 사이트가 여행자의 친구요, 메시아지만, 그마저도 비나 눈이 오면 도루묵이 되고 만다.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면 비로소 찾아올지니.’
이 수상하고 진부한 말이 오로라 관측 앞에선 진리가 된다. 내 인생 처음 오로라를 본 그 밤처럼.
처칠에 온 지 일주일쯤 됐을까. 내내 비만 뿌리던 잿빛 하늘이 드디어 조각난 날이었다. 밤 10시를 알리는 ‘북극곰 경계 사이렌’을 듣고도 잠이 안 와 한참을 말똥말똥 누워있던 그때, 이상한 게 보였다. 구름 사이 하늘 한 조각이, 초록색인 게 아닌가!
“설마 저거 오로라야?!”
막 잠에 빠져들던 하우스메이트를 습격해 창문으로 이끌었다. 답은 필요 없었다. 곧 구름이 갈라지고, 하늘이 열리고, 오로라가 나타났다. 난생 처음 보는 내 눈에도 그건 의심의 여지 없이, 오로라였다.
처칠 마을 위에 나타난 오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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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안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지만, 그 황홀한 춤사위를 더 선명하게 즐기고자 사람들은 빛 한 점 없는 곳을 찾아간다. 나도 종종 그 틈에 끼어 숲 속으로 오로라를 좇아가곤 했다.
가로등도 없는 비포장도로를 굽이굽이 달리면, 매서운 북쪽 바람에 한쪽으로만 잎이 자란 침엽수림이 나온다. 가이드는 북극곰이 언제 이 근처에 출몰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상기시키며 절대 무리에서 혼자 떨어지지 말고 정해진 곳에만 머물라고 당부한다. 처칠에 온 순간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교육받은 여행객들은 다른 답은 모른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마을을 벗어나면 언제 어디에 북극곰이 있을지 모르므로 총기 면허를 소지한 보안관이 먼저 내려 주변을 살핀다. 그리곤 다 함께 커다란 모닥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오로라를 기다린다. 화장실 갈 때도 북극곰을 살피며 2인1조로 움직이다니, 이보다 스릴 넘치는 오로라 투어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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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났어!”
눈썰미 좋은 이의 목소리를 따라가면, 어느새 하늘 귀퉁이에 초록빛이 걸려있다. 보일락 말락 하던 그 꼬리가 슬쩍 늘어나는 듯하다가, 정신 차려보면 한눈에 다 못 담을 만큼 커져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디까지 뻗었는지 알 수 없는 빛기둥은 하나가 셋이 되고, 금세 또 다섯이 되어 춤을 춘다.
흙길에 누워 얼굴 위로 쏟아지는 오로라와 별들을 보고 있으면 꼭 음악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림 같은 별자리 위로 슬쩍 오로라가 걸린다. 그리곤 오선지에 걸린 음표가 움직이듯, 빛이 별자리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있는 듯 없는 듯 ‘피아니시모’(Pianissimo·매우 여리게)로 시작된 그 연주는 이내 ‘크레셴도’(Crescendo·점점 세게)가 되어 하늘을 뒤덮는다. 귀가 먹먹한 것처럼, 마음이 먹먹해지는 밤. 북극곰만큼 새하얀 감시견 ‘쏘니’가 연신 쏘다니며 보초를 선다.
춤추는 오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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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도 오로라를 볼 수 있을까?”
툭 던진 질문에 주인장은 ‘아마도’라는 흐릿한 답을 내놓았다.
북극곰의 시력과 청력은 인간과 비슷하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리, 볼 수 있는 크기의 물체를 똑같이 판별할 수 있고, 눈부신 설원 위에서 자외선을 차단하는 특별한 막이 눈을 보호한다. (당신이 볼 수 있다면, 북극곰도 볼 수 있다는 것!)
사실 30㎞밖의 냄새도 또렷이 구분해내는 막강한 후각을 가진 북극곰에게 시력은 특별히 중요한 감각은 아니다. 한계가 있는 눈으로 물체를 파악하기 한참 전부터, 이미 냄새로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세상이 시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듯, 북극곰의 세계는 후각으로 만들어졌다.
그런 것치고 꽤 ‘좋은 시력’을 가졌지만, 인간만큼의 ‘색각’은 가지지 못했다. 온통 새하얀 환경에서 살아가는 북극곰에게 중요한 건 물체의 선명도지 색깔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어느 날엔가 연구센터 직원이, 북극곰은 푸른색과 녹색을 잘 볼 수 있는 반면 붉은 계열엔 약하다는 말을 했다. 아, 다행이다. 오로라는 녹색이다!
북극곰은 일생의 대부분을 홀로 떠돈다. 어미 곰에게서 독립하고 나면 평생 드넓은 북극을 유랑하는 것이다. 일 년의 반은 종일 해가 떠 있고, 나머지 절반은 어둠뿐인 곳을 혼자 걷는 삶. 그 고독하고 긴 여정에서 북극곰은 무슨 생각을 할까, 걱정한 적이 있었다. 새하얀 빙판 위에도 어둠이 내려앉는 밤이면 혹시 외롭진 않을까. 생각해보니 그들이 사는 세상 ‘북극’에는 1년 중 겨우 몇십일을 제외하고 ‘극광’(Northern Lights, 오로라)이 뜬다. 혼자 걷는 북극곰의 쓸쓸한 그림에 오로라를 그려 넣으니, 제법 씩씩해 보인다.
나는 북극곰이 오로라를 본다고 믿기로 했다. 어쩌면 오로라 감상을 즐기는 북극곰도 있을지 모른다. “암, 물결 모양보단 소용돌이가 최고지!”라며. 빙판의 숨구멍 앞에 앉아 물범을 기다리는 동안, 오로라 춤사위에 가만히 어깨춤을 추는 북극곰도 있으리라.
이제 막 굴 밖으로 나온 새끼 북극곰에겐 어미 곰이 오로라 감상법을 알려줄 것이다.
눈밭을 뒹굴대는 비장의 춤과, 명당도 일러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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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원주민들은 오로라를 ‘영혼의 춤’이라고 불렀다는데. 어쩌면, 그 혼들이 북극곰의 것은 아닐까?
저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혹시 누군가 북극곰이 나타났다고 외칠까 귀를 쫑긋 세운다. 다시 한 번 머리 위로 빛이 쏟아진다. 오늘 밤의 이 아름다운 춤도, 이름 모를 북극곰과 함께 감상한 것이기를.
글·사진 이태리 북극곰 마을 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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