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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80만명 학살 처벌 대신 용서…르완다 1000개 언덕에 희망의 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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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내전 끝낸 카가메 대통령

서로 돕는다는 ‘우무간다’ 등 추진

2001년 이후 연평균 8% 경제성장

새로운 아프리카 재건 모델로 각광

아직도 1인당 소득 754달러 최빈국

생계 노동 시달리는 어린이 즐비

한국 초록우산재단 등 지원 큰 힘

지난달 26일 아침,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의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도로에는 자동차가 한 대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시장과 상점, 음식점도 모두 문을 닫았다. 이날은 르완다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가 열리는 날이었다.

‘우무간다.’ 르완다어로 ‘함께 돕는다’라는 뜻의 이 행사는 매달 마지막 토요일 18∼65세까지의 모든 국민들이 참여하는 마을의 공동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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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오전 르완다 잘리 지역에서 '우무간다'(협동작업)에 참여하기 위해 주민 200여명이 모였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짓는 영유아 학교로 향하는 길을 내는 작업이다. 최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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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개의 언덕’을 일구는 삽


수도 키갈리에서 12km 떨어진 잘리 지역에 200여 명의 주민들이 속속 모였다. 산 너머 주민들도 오전 8시부터 삽과 곡괭이를 메고 나타났다. 20대 청년부터 60대 노인까지 마을 사람 대부분이 나왔다고 했다. 이날의 목표는 마을에 새로 짓고 있는 학교로 통하는 길을 새로 내는 것이다.

르완다는 ‘천개의 언덕’이라고 불릴 정도로 산악 지대가 많다. 학교를 짓기 위해서는 평평한 도로가 필수다. 주민들은 팔을 걷어 부치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불과 3시간 만에 새로운 길이 생겼다.

르완다에 희망의 아침이 밝기까지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1994년 내전으로 르완다는 전 세계가 기억하는 지옥의 땅이었다. 우리나라 경상남·북도를 합친 크기의 이 땅에서 대량 학살로 80만명이 숨졌다.

내전을 종식한 군부 출신 폴 카가메 대통령은 2000년 취임 후 강한 통제력으로 회복과 재건을 추진 중이다. 대표적인 게 1998년부터 도입된 우무간다 제도다. 그 결과 르완다는 아프리카의 새로운 경제 모델로 각광받고 있다. 르완다 경제성장률은 2001년 이후부터 연평균 8%를 기록하고 있다. 이날 우무간다에 참여한 메리 엔(25)은 “르완다 사람들은 아픈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이웃과 함께 땀을 쏟아낸다”며 웃었다.

하루에 죽 한 그릇 얻어먹는 아이들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지만 갈 길은 멀다. 르완다는 아직도 1인당 국내총생산이 754달러 수준의 최빈국이다. 절대적인 빈곤은 완화되고 있지만, 빈부 격차는 심각한 문제다. 키갈리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농촌에는 아동노동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이 즐비하다. 지난 2012년 기준 르완다 노동자의 중등교육 수료율은 4.5%다. 당장의 생계를 위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거나 유급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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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나 지역에 사는 엘리스(14)는 눈이 보이지 않는 할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이들은 이웃에게서 얻어온 죽 한그릇을 나눠 먹고 있다.최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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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의 막내 동생 장 폴(10)이 물통을 나르고 있다.최규진 기자




키갈리 외곽 자바나에 사는 엘리스(14)네는 오늘도 카사바 죽 한그릇이 유일한 식사다. 엘리스는 눈이 보이지 않는 할머니, 간질을 앓고 있는 여동생(12)과 막내 남동생(10)을 데리고 살고 있다. 아버지는 9년 전 어머니가 병사한 뒤 집을 나갔다. 할머니와 아이들은 이웃과 지역 교회에서 나눠준 음식으로 연명하고 있다. 하루종일 굶을 때도 있다. 일주일에 사흘은 굶는다고 했다.

“지금은 내가 장님이라는 이유로 이웃들이 도와주지만 죽고 나면 손녀·손자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할머니 카우두다씨(85)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날 엘리스 남매는 야산에서 야생 콩줄기를 주웠다. 다음달에 콩을 심어야 겨우내 먹을 게 생기기 때문이다. 여중생인 엘리스는 요즘은 남의 집 밭에서 일을 돕고 오후에 학교에 간다. 엘리스는 “할머니와 동생의 병을 낫게 해주는 의사가 되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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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잘리 지역에 사는 알프랑스(16)는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대신해 땔감을 줍는다. 왕복 2시간을 걸어 시내 장터에 땔감을 팔았을때 얻는 돈은 1500원 정도다.최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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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리에 사는 알프랑스(16)는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해 학교를 그만뒀다. 산 중턱에 햇빛도 들지 않는 흙집 안에 쌓아둔 나뭇가지와 물을 12km 떨어진 도시까지 2시간을 걸어서 나르면 하루에 1000 르완다 프랑(약 1500원)을 받는다. 아버지는 “아들이 일하지 않으면 식구가 먹고 살수가 없다”며 고개를 떨궜다.

알프랑스의 아버지도 평생 땔감을 팔았다고 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한 아버지의 빈곤은 알프랑스에게도 가능성이 크다. 교복을 입은 친구들을 보면 부끄러워서 도망을 다닌다는 알프랑스는 “동생들이라도 학교를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소를 사면 우유를 팔아서 돈을 벌고 집도 고칠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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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2일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르완다 G.s 자바나 초등학교에서 '그림왕양치기'로 유명한 작가 양경수(가운데)씨와 함께 데칼코마니 등 미술수업을 진행했다.최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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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손길


엘리스와 알프랑스의 손을 우리나라의 NGO 단체가 잡아줬다. 지난해 2월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현지 사무소를 설립하고 르완다 교육부와 함께 영유아 교육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둘은 학교에 다닐 수 있고 소를 살 수 있는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된다. 재단은 지난 5일 자바나 지역에 개원한 영유아 학교를 시작으로 3곳의 학교를 더 짓거나 고친다.

'그림왕양치기'로 알려진 만화가 양경수(33)씨도 초등학생을 위한 미술수업 등 이번 봉사에 동참했다. 양 작가는 "아이들과 그림으로, 때론 노래로, 춤으로 소통하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교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유지숙 르완다사무소 팀장은 “내전의 상처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어서인지 르완다인들이 교육을 통해 변화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남다르다. 작은 도움만 있으면 큰 변화를 이뤄낼 것”라고 말했다.

[S-BOX] "잔인한 4월을 기억하라" 처벌 대신 용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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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르완다 제노사이드로 두 아이와 남편을 잃은 피해자 메리아나(49). 최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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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내전의 상처는 깊다. 그만큼 치료는 쉽지 않다. 남편과 두 아이를 잃은 메리아나(49)씨는 수면제를 끊지 못한다. 투치족인 가족들이 후투족에게 살해당하는 현장을 눈 앞에서 목격했다. 시신은 3년전 재래식 화장실에서 100구의 다른 시신과 함께 발견됐다.

후투족과 투치족의 갈등은 정권을 잡은 후투족 출신 대통령의 암살 사건(1994년)을 계기로 전쟁으로 치달았고 투치족은 무차별 학살을 당했다.

르완다는 처벌보다는 화해와 공존을 선택했다. 정부는 2001년 대량학살 처벌 문제를 다루기 위해 1만2100개 마을에 ‘가차차’를 설치했다. 12만 명에 달하는 가담자를 감당하기 어려워 생긴 전통식 재판이다. 가해자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면 피해자들은 봉사 등 낮은 수준의 형벌로 용서를 했다.

당시 재판장을 맡았던 메리아나도 그랬다. 그는 "함께 살아가기 위해 용서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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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키갈리 기소지에 있는 제노사이드 추모기념관에 전시된 희생자들의 유골. 최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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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도 매년 4월이면 나라 전체가 추모 기간에 돌입한다. 전국에서 여덟 곳의 학살 현장을 보존해 개방하고있다.

학살생존자학생협회에서 일하는 파스칼 엔댬바제는 "절대로 반복되어서는 안되니 항상 기억하자는 의미다. 제노사이드의 반성은 현재 진행형이다"고 말했다.



최규진 기자 choi.ky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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